[천자 칼럼] '열린사회의 가장 큰 적'

허원순 논설위원
2015년 12월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김성국 저)이라는 두꺼운 책이 국내에서 발간된 적 있다. 932쪽 부피만큼이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라는 부제도 묵중했다. 부산대에서 사회학을 연구해온 저자는 학계에서 ‘무정부주의 기반의 자유주의자’로 평가받아 왔다. ‘개인과 자유’에 천착해온 저자의 ‘잡종사회론’은 한국 사회를 다원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의 이미지 공유를 부인하지 않았다. 칼 포퍼가 이 책에서 20세기의 시대정신으로 추구한 것이 자유주의였다. 포퍼가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소식을 듣고 망명지 뉴질랜드에서 집필을 시작한 게 이 명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포퍼가 열린사회, 자유주의, 개인, 다원화사회의 가치를 철학으로 정립했다면 투자와 기부로 이를 실천해온 그의 추종자가 조지 소로스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포퍼와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소로스는 런던정경대에서 사제 관계이기도 했다.

열린사회를 함께 꿈꾼 두 사람은 철학자와 전업 투자가로 이질적 삶을 영위했지만 지향점은 명확하게 같았다. 비영리 자선단체 ‘열린사회재단’ 등을 통해 소로스가 인권 반공 교육 복지에 기부한 게 80억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1969년 ‘퀀텀펀드’ 설립 이후 20년간 연평균 수익률 34%, 1992년 파운드화 약세에 베팅해 영국 중앙은행 굴복시키기 등 그의 투자 성과는 전설이 돼 간다. 그 과정에서 ‘자선사업가’와 ‘자본주의 악마’라는 극단의 평가를 함께 받기도 했지만, 현대 자본시장에서 소로스만큼 용기 있게 전체주의와 독재 정권을 비판한 인물도 드물다.

아직도 ‘헤지펀드의 대부’ 소리를 듣는 그가 또 한 번 세계의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지난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맹비판한 것이다. “시진핑은 열린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했고, “IT로 국가 주도의 국민감시 시스템을 만들어 민주사회를 위협한다”고도 했다. 시진핑의 중국몽 정책인 ‘일대일로’에 대해서도 “중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지, 수혜국을 위한 게 아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개인에게 신용등급을 부여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사회신용 시스템’은 “빅브러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했다.하루 만에 중국 외교부가 반박 브리핑까지 했을 정도로 파장이 커졌다.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은 물론, 툭하면 주변국에 완력 행사도 불사할 듯한 중국의 거친 행보를 떠올리며 소로스의 작심 비판에 수긍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89세 ‘투자 거장’의 서슬이 아직 살아있다. 개인과 국가, 인류와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용기가 그를 ‘리스크 비즈니스’인 투자의 세계에서 최강자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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