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연설서 韓 의도적 외면한 日 아베, 北과는 "국교 정상화"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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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후 가장 긴 시정연설서 한국을 단 한번 부수적으로 언급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8일 일본 의회 시정연설에서 의도적으로 ‘한국 무시전략’을 구사했다. 1만2800자에 달하는 분량, 52분간 이어진 연설에서 한국 관련 내용은 통째로 빠졌다. 일본 초계기의 저공 위협비행 및 레이더 조사(照射) 시비, 과거사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가운데 아베 총리가 갈등에 폭탄을 달았다.
강경 기조 유지하겠다는 포석
강제동원 판결·위협 비행 등 韓·日 갈등 해결 기미 안보여
‘단 한번’ 언급된 한국아베 총리는 ‘일본의 외교적 입지를 부각시키겠다’는 항목에서 “북한과는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며 “이를 위해 미국과 한국을 필두로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연설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언급된 부분이다.
아베 총리는 미국에 대해서는 “일·미 동맹은 일본 외교와 안전보장의 기축(基軸)”이라고 치켜세웠다. 중국을 지목해선 “지난가을 방중을 계기로 일·중 관계가 완전히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러시아와 관련해선 “상호 신뢰와 우정을 다지고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사실상 사라졌다. 아베 총리는 2017년까지 매년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표현해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위안부 합의 문제가 거론되면서 지난해 시정연설에선 한국에 관례적으로 붙던 우호적 수식어구마저 삭제됐다.전문가들은 아베 총리가 이 같은 ‘백안시’ 전략을 들고나온 것은 앞으로 한국에 강경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은 “한국과 더 이상 1 대 1로 상대하지 않고 국제전으로 가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며 “한·일 레이더 갈등을 내부 지지층 강화로 연결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지적했다.
북핵 해결에 ‘재팬 패싱’은 없다
아베 총리는 북한에 대해선 국교 정상화와 정상회담 추진을 강조했다. 그는 “핵·미사일 문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깰 것”이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마주보며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단성 있게 행동하겠다”고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또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지향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지난해 시정연설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중대하고 임박한 위협”이라며 “북한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어떤 도발에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강조한 것에서 180도 바뀐 셈이다.
북한에 대한 아베 총리의 태도 전환은 지난해 미·북 정상회담 개최에 이어 올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등 양국 간 협상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재팬 패싱(일본 소외)’이 지속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시각도 있다.
美, 중재자로 나설까한·일 갈등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이날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를 방문해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만났다. 국방부 관계자는 “해리스 대사가 이날 낮 12시45분 국방부를 방문해 정 장관과 여러 현안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지난달 20일 일본 P-1 초계기가 광개토대왕함의 사격통제레이더(STIR-180)에 조준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한·일 국방당국 간 충돌이 빚어진 뒤 첫 공식 만남이다. 두 사람의 면담은 비공개로 약 1시간20분간 진행됐다.
국방부는 세부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정부 관계자는 “방위비 분담금과 일본 초계기의 저공 위협비행 문제도 거론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해리스 대사가 현직 부임 직전까지 미군 인도태평양사령관을 맡은 해군 4성장군이었던 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 장관은 일본 측 주장의 부당성과 한국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이 문제에서 “한·일 당사자 간 풀어야 할 문제”라고 중립적 태도를 지켜온 미국이 이번에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지 주목된다. 미국이 ‘중간 다리’로 나선다면 한·일 갈등의 해결 실마리가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도쿄=김동욱 특파원/이미아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