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인류 문명 이끈 건 馬力…종교도, 기술도 네 다리 통해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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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세계사말은 기원전 4000년경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처음으로 사육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000년간 종별로 확산과 멸종을 거듭하며 인간과 공생해왔다. 《말의 세계사》는 말과 함께해온 인간의 역사를 시공간으로 꿰뚫어 보여준다.
피타 켈레크나 지음 / 임웅 옮김 / 글항아리 / 752쪽│3만8000원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로 퍼져나가며 구세계 문명을 구축한 말 문화는 야생말이 멸종해버린 신세계와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인간의 걸음으로 이동거리는 하루평균 21~28㎞ 정도에 그쳤지만 말을 탄 칭기즈칸 정예 전령들은 매일 400㎞를 달릴 수 있었다. 말이 없는 곳에서는 교역과 문화 교류에도 한계가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문자 체계는 남아메리카에 전해지지 않았다. 반면 알렉산더는 그리스 알파벳을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 등에 소개했다.세계 문명사에 미친 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숫자 ‘0’이다. 마야인이 ‘0’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것은 인도인보다 500년 정도 앞섰다. 하지만 마야의 ‘0’은 중앙아메리카와 아메리카 중부를 넘지 못했다. 반면 인도의 ‘0’은 말과 함께 유라시아를 넘어 동쪽과 서쪽으로 전파됐다.
세계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종교의 분포도 말과 관련이 있다. 책에 따르면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여러 나라에 걸쳐 있고 각각 약 21억, 15억, 9억, 3억7600만 명의 신자를 두고 있다. 저자는 네 종교가 기마술과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아랍인은 말을 타고 동쪽으로 인더스강 하류, 서쪽으로 톨레도, 남쪽으로 가나까지 이슬람교를 빠르게 전파했다.말의 이동성과 안정성에 있어 ‘혁신’이라 부를 만한 등자의 진화를 서술한 부분도 흥미롭다. 등자는 말안장 아래 발을 대는 발받침이다. 기원전 4세기경 처음 등장한 가죽끈 등자는 과격한 말의 움직임을 견딜 수 없어 위험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리 안에 단단한 디딤판을 고정했고, 나무 등자에서 금속 등자로 발전했다. ‘등자의 진화’로 기마병의 공격력은 배가 됐다. 무기를 휘두르면서 낙마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말 위에서 활을 쏘면서 달릴 수 있었다.
말을 길들인 변방의 부족들은 수천 년간 서쪽과 남쪽, 동쪽으로 문명의 중심지를 약탈했다. 파괴의 역사 이면엔 신기술의 도입과 종교를 포함한 사상의 전파, 과학과 예술의 확산이라는 효과도 함께했다. 저자는 기마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가 개척한 광대한 이동 경로 덕에 원거리 교역이 가능했고 신속한 운송도 할 수 있었던 양면성에 주목한다. 말은 인류에 이전엔 지닐 수 없었던 기동성을 안겨줬고 문화적 성과의 전달성을 높였지만 갈등의 강도도 함께 증가하면서 전쟁 규모를 키웠다. 유럽인이 식민지를 개척하며 세계로 팽창해나간 데도 이런 양면성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말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6000년간의 세계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