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벅' 퇴출시킨 콧대 높은 호주인들, 한국인 바리스타 커피엔 '엄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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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점령한 'K커피'‘블랙, 화이트, 필터.’
호주에 뿌리 내린 커피 한류
한국인 바리스타 300여명, 호주 '커피 수도' 멜버른서 활약
강병우 에이커피 대표가 1세대
고현석·김진우·차성원 등 여러 대회서 우승 휩쓸어
호주 주류 커피 문화 선도
한국서도 호주식 커피 확산
"획일화된 탄 맛 아닌 원두 고유의 맛 찾아"
지난달 30일 찾은 호주 멜버른 중심가의 카페 메뉴판은 이처럼 단출했다.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에 익숙한 한국인이 처음 멜버른 카페에 가면 당황할 법하다. 블랙은 에스프레소를 긴 시간 추출한 ‘롱블랙’, 화이트는 카페라테와 유사한 ‘플랫 화이트’, 필터는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스페셜티 커피를 말한다. 카페 직원들은 커피 한 잔을 내올 때마다 어떤 로스터리의 어떤 원두를 썼는지, 특징은 무엇이고 어떻게 커피를 추출했는지 상세한 설명이 적힌 카드를 함께 내줬다. 한국에서 이제 막 시작 단계인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이들에겐 이미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스타벅스를 8년 만에 퇴출시킨 나라. 커피 격전지인 호주에서 한국인 로스터와 바리스타들이 커피 문화의 새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 커피 챔피언십(WBC·World Barista Championship)에 출전하는 호주 국가대표 선수 명단에 한국인이 수년째 이름을 올린다. 챔피언 선발전에 나오는 선수 중 60~70%는 한국인. 이들은 세계 커피 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한다. ‘호주에서 꼭 가봐야 할 카페’에 꼽히는 곳마다 한국인 바리스타나 로스터가 없는 곳이 거의 없다.
2000년대 ‘워킹 홀리데이’가 시작
호주의 커피 문화는 뿌리가 깊다. 1950년대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의해 에스프레소 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멜버른은 1970년대에 카페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멜버른은 호주 모든 도시를 통틀어 ‘커피의 수도’라 불린다. 1등 기업은 없지만 그 대신 수백 개의 카페와 로스터리가 각각의 개성을 내세우며 공존한다. 호주 관광청에 따르면 멜버른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커피 생두 수입량은 지난 10년간 780% 증가했다. 매일 30t의 커피가 들어온다. 매일 약 300만 명이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양이다.멜버른은 10여 년 전부터 한국의 젊은 바리스타들에게 ‘꿈의 도시’가 됐다. 25년 전 호주 정부가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행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한 ‘워킹 홀리데이’가 발단이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참가하는 한국인 수는 2000년 이후 급증했다. 2006년 이후 매년 2만~3만 명이 호주를 찾았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누적 인원 수는 30만 명. 농장 대신 도심 카페를 선택한 이들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멜버른에 있는 한국인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약 300명이다. 시드니 등 다른 지역을 합치면 600~7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호주를 거쳐 간 한국인 바리스타들에게 ‘대부’로 불리는 강병우 에이커피 대표(38). 그는 “2006년 사진을 공부하러 왔는데 그때가 막 호주 스페셜티 커피와 로스팅 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며 “당시 호주 커피업계에 거의 유일한 동양인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 로스터리의 양대산맥인 세인트알리와 마켓레인 등에서 로스터와 바리스타, 트레이너 등으로 10여 년을 보냈다. 2014년 호주 컵테이스팅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국가대표 자격으로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호주 커피 국가대표, 한국인이 점령
강 대표의 우승 이후 호주 커피 챔피언십은 한국인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라테아트 △컵테이스팅 △커피 인 굿스피릿 △브루어스 등 4종목으로 나뉜다. 이 중 컵테이스팅은 2014년 강 대표 이후 5년 연속 한국인이 우승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고현석 바리스타가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2017년과 2018년에는 김진우 바리스타가 1위를 했다. 김진우 바리스타는 지난해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라테아트 부문에서도 2015년 차성원 바리스타가 국가대표에 이어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2017년에 신동수 바리스타가 호주 대회에서 1위를 했다. 지난해 시드니 킹스우드커피의 바리스타 겸 로스터인 야마 김은 브루어스컵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외에도 홍찬호 이희상 이정기 김정진 바리스타 등이 호주 주류 커피 문화를 이끌고 있다.
1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호주의 한국인 커피 피플 1세대들은 저변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강병우 로스터 겸 바리스타는 자신의 로스터리 브랜드 ‘에이커피’를 창업했고, 2년 만에 멜버른에서 인정받는 커피 브랜드가 됐다. 고현석 바리스타(35)는 멜버른의 유명 카페 듁스커피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커피 무역으로 100년이 넘은 기업 베넷에서 생두 트레이딩을 책임지고 있다. 호주 국가대표로 출전해 세계 라테아트 챔피언이 된 차성원 바리스타(40)는 최근까지 월드투어를 다닌 뒤 멜버른에 ‘타이거러스 에스프레소’라는 카페를 열었다. 차 대표는 “타이거러스 카페를 호주에 5개 정도 열고, 그중 1개는 트레이닝 센터로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멜버른의 커피 문화, 한국에 이식
멜버른에서 시작된 호주식 커피 문화는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영국, 미국 등은 물론 국내에서도 플랫 화이트, 롱블랙 등 호주식 커피 메뉴를 다루는 카페가 많아졌다. 한국에는 그 속도가 더 빠르다. 호주의 커피 문화를 경험한 한국인 바리스타와 로스터가 귀국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식되고 있다. 3~4년 전부터 카페 메뉴에 호주식 이름이 등장한 것은 물론 최근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유명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인 듁스커피의 원두는 호주 출신인 이기훈 바리스타가 한국 총괄 판매를 맡아 전국에서 만나볼 수 있다. 마켓레인커피, 오나커피도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고현석 듁스커피 바리스타는 “호주에서는 원두 로스팅 자체를 가볍게 함으로써 원두 본연의 맛을 즐기는 문화가 1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며 “스타벅스의 획일화된 탄 맛에 길들여졌던 한국인들이 다양한 커피 맛을 찾으면서 호주의 커피 문화가 각광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멜버른·시드니=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