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담판 길목 美 '동시·병행' 원칙 공식화…주고받기 탄력 주목

'단계적 비핵화' 무게이동 흐름과 맞물려…中 '쌍궤병행'과도 연결
제재완화 등 '디테일싸움' 힘겨루기는 불가피할듯…美조야 일각 후퇴 우려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월 말 제2차 북미 정상회담과 그 조율을 위한 실무협상을 앞두고 '동시적·병행적'(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원칙을 공식화, 비핵화 실행조치-상응조치 간의 주고받기식 '딜'이 탄력을 받을지 주목된다.북미 실무협상의 미국측 대표인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지난달 31일 스탠퍼드 대학 월터 쇼렌스틴 아·태연구소가 주최한 북한 관련 강연에서 "우리 역시 북한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약속을 지킨다면 두 정상이 지난 여름 싱가포르 공동 성명에서 했던 모든 약속을 동시에 그리고 병행적으로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FFVD 약속 이행'이란 전제조건을 달긴 하지만, 미국의 최우선 목표인 북한 비핵화 문제와 함께 지난해 1차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포함된 '북미간 새로운 관계 구축', '한반도의 지속적 평화체제 구축' 등 다른 합의사항에 대해서도 비핵화 속도에 맞춰 동시에 진행해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동시적·병행적' 원칙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1일 신년사에서 재확인했던 '단계적·동시적 이행' 기조와 연결지을 수 있는 대목이다.미국이 일찌감치 초기의 일괄타결식 속도전 모드에서 벗어나 장기전을 기정사실화하며 속도조절론을 펴왔지만, 협상에 임하면서 '동시적·병행적' 원칙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북한의 이러한 방식을 일정부분 수용하겠다는 뜻을 시사하면서 사실상 궤도수정을 공식화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만큼 유연성을 발휘, 협상을 타결짓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면서 비핵화 실행조치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촉구한 것으로, 특히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이날 강연에서 제시한 단계적 비핵화 로드맵과 맞물려 주목을 받고 있다.

FFVD라는 목표는 유지하되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어떠한 상응 조치도 없다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올 오어 낫싱)식의 '선(先) 비핵화'가 아니라 전체 경로를 쪼개 단계별로 비핵화 조치와 그에 따른 상응 조치를 엮는 방식을 일정부분 받아들인 것이어서다.비건 특별대표는 강연에 이어진 일문일답에서도 '미국이 북한에 대해 '동시·병행적으로' 조치하겠다는 것과, '북한이 모든 것을 다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 사이에 혼란이 있다'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당신(북한)이 모든 걸 다 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며 "그것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합법적 평화'를 가져올 방법, 비핵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동시에 찾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때 한 이야기도 북한의 경제 발전을 도우며 이 목표를 이루려 노력하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비건 특별대표는 북한 비핵화가 완료되기 전에는 대북 제재완화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재차 확인했다.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비건 특별대표의 강연과 관련해 트윗에 올린 글에서 "비건 특별대표가 강조한 대로 우리는 북한 주민을 위한 밝은 미래에 대한 구상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한 모든 약속에 대한 진전을 '동시적·병행적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동시·병행' 원칙을 확인했다.

특히 이러한 '동시적·병행적 기조'는 중국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쌍궤병행'(雙軌竝行·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미 평화협정 협상) 해법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무역 전쟁 휴전을 계기로 미국이 중국과의 대북 공조를 복원하려고 하고, 중국이 지난달 북·중 정상회담 등을 통해 북·중 간 밀착을 강화하며 '역할론'을 자임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동시적·병행적 기조'가 시기적으로도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

다만 폼페이오 장관이 '동시적 추진 원칙'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3차 방북(7월6∼7일)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제재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다른 별도의 문제'라며 예외임을 강조하면서도 "공동 성명의 세 부분인 평화로운 관계 구축, (체제) 안전 보장, 비핵화는 각각 동시에 이뤄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관련 노력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비핵화가 일어나는 동안 그 과정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일정한 안전 보장에 도움이 되는 조치들과 양국 간 관계 개선이 (함께)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비핵화가 완전히 끝나기 전이라도 어느 정도 진정성이 확인된 단계에서 체제 안전 보장과 관계 개선을 위한 조치들이 일정 부분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러한 '동시 추진' 방침이 이번에 '동시적·병행적'(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기조로 보다 구체화한 가운데 비건 특별대표가 언급한 비핵화의 단계적 경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단계별로 그에 맞춰 꿰어질 상응 조치들과 '조합'을 이루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로드맵이라는 전체 청사진을 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건 특별대표가 내놓은 단계적 비핵화 로드맵은 '영변을 뛰어넘는 북한의 플루토늄 및 우라늄 농축 시설 폐기' → '핵 관련 포괄적 신고 및 해외 전문가들의 사찰·검증' → 핵분열성 물질과 무기, 미사일, 발사대 및 다른 WMD(대량파괴무기)에 대한 제거 및 파괴' 이다.

여기에 핵 동결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및 해외 반출 문제 등도 시점 상으로 앞부분에 배치하는 방안이 북미 간에 조율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미국이 '어느 시점'이라며 핵신고를 일단 뒷순위로 미루는 유연성을 보인 가운데 이러한 단계별 비핵화 과정들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떠한 상응 조치를 얹느냐가 이르면 5일 열릴 것으로 알려진 '스티븐 비건-김혁철 라인'의 실무협상에서 해야 할 퍼즐 맞추기의 핵심인 셈이다.

북미 간 연락사무소 설치와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 논의, 대북 투자 그리고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 및 대북 제재완화 등이 상응 조치로 거론돼온 카드들이다.

미국이 문턱과 눈높이를 다소 현실적으로 조정한 듯한 흐름과 맞물려 그만큼 딜 성사에 대한 기대감도 이전보다 높아지는 기류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도 3일 방송된 미 CBS 방송 인터뷰에서 2차 정상회담 전망과 관련, "합의 가능성이 크다"고 낙관론을 견지했다.

그러나 미국측이 여전히 제재완화에 대해서는 비핵화 초기 실행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로는 쉽지 않다는 분위기여서 북미 협상의 최대 난제인 제재 해제 방정식 풀기가 순탄하게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비핵화 실행조치와 상응조치를 둘러싼 구체적 '디테일 싸움'으로 들어가면 힘겨루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에 더해 미 조야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비핵화의 속도와 수준이라는 점에서 당초 목표로 했던 종착지보다 하향조정, 후퇴한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폼페이오 장관이 최근 '미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제시한데 이어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확장 능력 감축'을 강조한 것을 놓고 미국이 '본토 위협 제거' 쪽으로 무게를 이동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돼온 연장선 상에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