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한복판서 벌어질 '톱다운 외교' 수싸움…배수진 친 비건 대표

미·북 모두 시간에 쫓겨
트럼프, 비건에게 ‘메신저’ 역할 맡긴 듯
北 김정은과 면담 가능성도
의제 조율 범위 예상보다 넓을 전망
이번달 말 예정된 2차 미·북 정상회담 관련 실무협상을 맡은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6일 평양을 방문해 김혁철 전 주(駐)스페인 북한 대사를 비롯한 북한 측 카운터파트들과 마주앉는다. 미·북 간 실무협상이 평양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 국무부는 5일 홈페이지에 게시한 성명을 통해 “비건 특별대표가 북한 측 카운터파트인 김혁철과 협상하기 2월 6일 평양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또 협상의 목적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이룬 합의, 즉 완전한 비핵화와 미·북 관계의 변화, 한반도의 지속적 평화 구축을 보다 진전시키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일단 미 국무부는 평양 방문을 6일 하루로 못박았다. 통상적으로 하루 이상이 될 경우 날짜를 명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일치기 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하루나 이틀 더 머물 가능성도 있다. 당초 비건 대표와 김 전 대사의 협상은 설날 당일인 오늘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하루 연기됐다.

비건 대표가 첫 실무협상에서 배수진을 치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촉박한 회담 준비 시간이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미 회담 시기를 이달 말로 발표했고, 5일 오후 9시(한국시간 6일 오전 11시)로 예정된 국정연설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두 번째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를 공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의제 조율과 합의문 초안 작성, 회담 장소의 경호와 의전 준비 등을 마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과 더불어 ‘톱 다운’ 방식으로 작업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비건 대표에게 ‘메신저’ 역할을 맡겼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김정은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는 평양에서 영변 핵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 등 북한 핵시설 폐기 및 핵 관련 리스트 확보, 비핵화 관련 실질적 이행, 미국이 제공할 상응조치 등을 좀 더 폭넓은 범위로 자유롭게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평양은 사실상 외부와 차단돼 있기 때문에 판문점보다 실무협상의 기밀을 지키기도 훨씬 편리하다.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는 “미국과 북한 간 의제 조율이 아직 초기 단계 수준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비건 대표의 첫 실무협상 장소가 평양이란 게 그리 좋은 신호라 보긴 어렵지만 미국과 북한 양측으로선 제일 실무적인 노선을 택한 것 같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톱 다운 외교 방식이 이 같은 파격적 행보로 나타났으며,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제재 완화를 강조하는 북한 사이에서 어느 정도로 간극이 좁혀질지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인 합의문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며 “뭔가 예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건 대표가 평양행을 선택한 건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것”이라며 “비록 장관급이 아닌 실무협상 담당자라 해도 김정은 입장에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를 충분히 면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비건 대표는 차관보급 인사다.
현재 비건 대표의 동선과 일정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일정만 봐도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난 3일 방한하자마자 한국 측 카운터파트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난 그는 이튿날 청와대에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회동했다. 5일엔 서울 시내 숙소에서 5일 오전 9시35분께 모처로 빠져나갔다. 평양 방문 및 실무협상 준비로 분주할 것으로 관측된다.비건은 6일 이른 아침 평양으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오산 미군기지에서 이륙하는 미군기를 타고 가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 북한의 열악한 도로 사정상 이동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기 때문이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