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더이상 '세계 경찰'은 없다…각자도생 시대, 한국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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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미국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를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 미국이 계속 싸워주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피터 자이한 지음 / 홍지수 옮김
김앤김북스 / 544쪽│1만9000원
지난해 12월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알아사드 공군기지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의 호구(sucker)가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철군과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 축소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일 CBS 인터뷰에서는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할 건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곧이어 “어쩌면 언젠가는, 누가 알겠는가”라며 “주둔 비용이 많이 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는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트럼프의 돌발행동’이나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미 예고된 수순으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데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책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로 인해 바뀌어갈 세계 정치의 지형을 그려본다.
저자인 피터 자이한은 지난해 국내 출간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을 통해 이름을 알린 국제 정세 및 전략 분석가다. 2014년 당시 미국의 에너지 자립과 중국의 수출 의존도를 대비시키며 ‘앞으로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나라는 없다’는 주장으로 화제를 모았다. 미국 국무부에서 일하다 민간 정보기업인 ‘스트랫포’에서 부사장으로도 근무한 그는 현재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기업과 정부 기관 등에 세계정세 분석과 지정학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중국과 미국 간의 역학구도에 중점을 둔 전작과 달리 이번 책은 미국이 세계 질서 유지에서 발을 뺀 이후 전 세계에 미칠 파장을 예측한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에 관심이 멀어진 이유를 셰일혁명에서 찾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은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왔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수호뿐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에너지 확보를 위해 미국은 직접적으로 분쟁에 개입했다. 1991년 걸프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등도 사실상 석유 확보를 위한 전쟁이란 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에너지 혁명, 즉 셰일가스가 본격적으로 채굴되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저자는 미국의 셰일 생산량이 늘면서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근접했다”며 “더 이상 에너지를 수입하지 않게 되면 미국과 세계의 운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끊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이 주도해온 안전보장 체제와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지고 그간 통제해온 지정학적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계속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며 “한국을 비롯해 모두가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때 한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진영에 대한 미국의 안보 의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소련은 붕괴했지만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아시아의 바닷길을 장악하려 나설 수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한국은 ‘뭍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상대인 중국과 바다에서 월등히 뛰어난 일본’ 사이에 끼어 있다. 한국이 다시 ‘비극적인 싸움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을 이용하면서 중국과 일본을 동시에 통제하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이 필요함을 책은 일깨운다.저자의 주장은 명료하고 근거는 설득력이 있다. 문장은 간결하고 단호해 이해하기도 쉽다. 다만 일부는 치우쳐 있고 어떤 부분은 과장돼 있다. 그럼에도 새겨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미국의 움직임에 옳고 그름을 따질 때가 아니다. 그 변화의 동력은 무엇이고 변화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세계정세를 읽어 우리 입장에서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고 실리적인 대응 방법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