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통상임금 '신의칙 혼란' 외면한 대법원

"신의칙 판단기준 제시 서두르고
복잡한 임금체계도 재검토해야"

추광호 <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 >
지난 14일 대법원이 내린 인천 시영운수의 통상임금 소송에 대한 판결로 인해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게 됐다. 애초 관련 당사자들은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이 통상임금 적용과 관련해 혼란스러운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에 대해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판결은 구체적인 판단 기준은 제시하지 않은 채, 신의칙 위반 적용은 신중하고 엄격해야 한다는 판시를 추가했다. 결국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인 기업들의 불안감은 가중되고, 막대한 추가 인건비 부담의 가능성은 더 높아지게 됐다.통상임금 범위와 관련한 판례는 많은 혼란이 있었다.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은 모든 근로자에게 정기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런데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고 임금수준을 정한 경우엔 예외를 뒀다. 즉 근로자 측이 임금협상 당시에는 생각지 못한 사유를 들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고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라고 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예상치 못한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면 추가 법정수당 청구는 신의칙에 위배돼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신의칙 적용과 관련한 판례의 견해가 일관되지 못하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적용이 심급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도 다수 발생하면서, 구체적인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2013년에서 2017년 8월까지 100인 이상 기업 중 195개 기업이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했고, 심지어 한 기업에서 18건의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혼란의 원인은 신의칙 적용에서 ‘경영상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의 위태로움’이 중요한 판단요소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영상황에 대한 인식은 판단 주체나 판단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보니 혼란스러운 판결이 계속되는 것이다.신의칙은 계약당사자 상호 간에 형성된 신뢰를 일방 당사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깨뜨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민법의 기본원칙이다. 따라서 통상임금에서의 신의칙 적용은, 임금협상 과정에서 노사 간에 형성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가 쟁점이 돼야 한다.

물론 경영상의 어려움은 부차적 요소로 검토될 수 있다.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 같은 입장에서 근로자 측이 임금협상 당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유를 들어 기존에 합의한 임금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예상외의 이익을 추구하고 이로 인해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면 신의칙에 위배됨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후 일부 판결은 주로 경영상 어려움에만 초점을 맞춰 신의칙 위배 여부를 판단하다 보니 경영상황에 대한 판단이 제각각이어서 혼란이 가중된 것이다.

이번 시영운수 판결로 인해 통상임금 관련 소송 중인 많은 기업의 위험은 더욱 커지게 됐다. 무엇보다 신의칙 적용의 구체적인 기준을 분명하게 마련해야 한다. 노사가 협상 과정에서 형성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돼야 하며, 경영지표뿐 아니라 해당 산업의 경쟁상황과 기업의 경쟁력 확보 관점에서 경영상의 어려움이 판단돼야 한다. 나아가 이 같은 문제의 근본 이유가 되는 복잡한 임금체계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