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이 사랑한 '황금자라 섬' 비렁길엔 지금 동백꽃비가 내린다

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여수 금오도
자라 모양을 하고 있는 황금 자라의 섬 ‘금오도’는 조선시대 국영 사슴목장이 있어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주민의 거주가 금지됐다.
동백꽃 터널을 지나면 나타나는 황금 자라의 섬 여수 금오도는 다산의 글에 언급된 곳이다.

“북쪽 바람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머나먼 남쪽 강진의 주막집에 던졌구나/다행히도 나지막한 산 있어 바다 모습 가리고/우거진 대숲이 가는 세월 알려주니 더욱 좋아라/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술이야 근심 많아 더욱 마시네/한 가지 유배객의 시름을 덜어주는 것은/섣달 전에 붉게 핀 동백꽃이라네.” <다산 정약용 ‘객중서회(客中書懷)’>다시 동백의 시절이다. 다산도 동백을 지극히 사랑했고 동백으로부터 위로받았다. 다산뿐이랴. 이규보,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찬탄하며 노래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도 고고함의 상징인 동백을 애정했다.
겨울꽃의 대명사 동백꽃.
“두 가지 동백나무 각자 다른 정 있나니/동백 춘백 그 풍도를 누가 능히 평하리오/사람들은 모두 봄철 늦게 핀 꽃 좋아하나/나는 홀로 눈 속에 핀 동백 너를 좋아하네.”

평생 꽃에 미쳐 살았던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동백을 찬탄했다.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동백이 흐드러진 여수 금오도

동백은 두 번 핀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또 한 번. 살아서 한 번, 죽어서 또 한 번. 세파에 찌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데 동백만한 꽃이 또 있을까. 꽃 시절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절정에서 툭 떨어지는 꽃. 화려했던 날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갈갈이 찢어져 흩날리는 벚꽃이나 모란꽃에 비해 동백은 얼마나 절조 있는가. 그래서 동백은 어떤 것이 꽃다운 삶인지를 되돌아보게 해 주는 생의 거울 같은 꽃이다.
거센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돌로 지은 금오도의 돌집.
흔히 동백은 그 이름처럼 겨울 꽃의 대명사지만 실상 개화기간이 가장 긴 꽃 중 하나다. 남녘에서는 늦가을에 피기 시작해 늦봄까지도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물경 반년 가까이 꽃을 피운다. 그래서 피는 때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다. 가을에 피면 추백, 봄에 피면 춘백, 겨울에 피어야 비로소 동백이다. 흔히 내륙지방 사람들은 동백이 오동도, 지심도 같은 몇몇 섬이나 선운사 정도에만 피는 줄 알지만 실상 동백은 남쪽 지방이면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비렁길로 유명한 여수 금오도 또한 동백섬이라 이름할 만한 섬이다. 동백은 실용성도 뛰어나다. 요즘 들어 동백 오일이나 동백 화장품이 인기지만 옛날 여인들은 늘 동백기름을 머리에 발랐다. 또 식용이나 등잔불 밝히는 데도 사용했다. 남쪽 섬들에서는 섣달그믐 저녁이면 동백꽃 우린 물로 목욕했다. 동백꽃 물로 목욕하면 종기도 치료되고 피부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동백은 주술적인 힘도 가졌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볼기나 엉덩이를 치면 그 여자는 사내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묘장(卯杖) 또는 묘추(卯錐)라 했다.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지만 동백이 아닌가. 가지가 아니라 동백꽃으로 때리는 풍습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동백꽃에 맞으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속설과 함께. 그러면 겨우내 맞아도 후회 없었을 것을.

황금 자라의 섬, 조선시대는 사슴목장으로 쓰여

금오도에서 동백이 특히 아름다운 곳은 비렁길 3-4코스다. 바람 부는 날 비렁길 동백 터널을 걷는다면 떨어지는 동백꽃 벼락을 맞을 수도 있겠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말. 비렁길은 그 유명세처럼 최고의 섬 트레일이다. 함구미선착장에서 장지까지 18.5㎞를 가는 내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옛날 지게 지고 다니던 섬 둘레길을 복원했는데 아주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가파르지 않고 평탄하다. 이 비렁길을 가장 평온하게 걸을 수 있는 때는 바로 이즈음이다. 붐비지 않고 더없이 한가하게 걸을 수 있다. 겨울이면 온 나라가 추울 것이라 생각해서 금오도를 찾는 이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부 내륙이 영하 10도를 내려가도 남쪽 섬은 영상이다.
서남해안 섬에서 주로 발견되는 초분(草墳).
금오도란 이름은 섬의 형태가 자라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래서 황금(金)자라(鰲)의 섬이다. 대체 누가 자라인지 남생인지, 거북인지 구분했을까 싶긴 하다. 조선시대 금오도는 나라에서 국영 사슴목장으로 또 왕실의 관을 짜는 소나무인 황장목을 기르는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공도정책으로 백성들의 섬 거주를 금지한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직후부터는 대부분의 섬에서 사람의 거주가 허락됐지만 금오도는 조선 왕조가 끝나갈 때까지도 주민 거주를 금지했다. 왕실을 위해 철저히 봉쇄한 것이다.

금오도에 다시 사람살이가 공식 허가된 것은 1885년이다. 그래서 몇백 년 만에 금오도에 다시 들어온 사람들은 개척민이었다. 산을 개간해 논밭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면사무소 앞에는 1918년에 세워진 ‘금오도민유지해결기념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금오도 개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6년 10월 26일 세워진 ‘금오도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금오도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 마을 당제를 지낼 때 호랑이 한 쌍이 나타나 당제를 모시는 동안 근처를 배회하다가 당제가 모두 끝나면 돌아갔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폐그물, 통발 등 해양 쓰레기로 바다 가뭄 심각

비렁길 때문에 한 해 30만 명이 찾아드는 금오도는 이름난 식당이나 화려한 펜션들도 많지만 금오도에서는 허름한 어부의 민박집에 묵어야 진짜 섬 밥상을 받을 수 있다. 어부의 아내인 여주인이 오늘도 바다를 통째로 담아낸 저녁 밥상을 차리셨다. 문어무침, 전어구이, 고시(작은 삼치)찌개, 고동무침, 낙지무침에 대합탕, 해삼물회. 이토록 가득 차려 내시고도 여주인은 차린 것 없다고 겸양이시다.
“문밖에만 나오면 다 객지요. 많이 잡수씨오.”

어부는 30년 넘게 어장을 해왔다. 예전에는 매일 돌산읍 군내리 어판장으로 팔러 다녔는데 요즘은 1주일에 한두 번 갈까 말까다. 그만큼 바다에 물고기가 줄었다는 뜻이다. 이장님도 고대구리배가 없어지면서 바다가 황폐화됐다고 생각한다.

“묵혀 놓은 땅하고 같아요. 밭을 갈아줘야 곡식이 자라지. 고대구리배가 바다를 갈아줬었는디.”

저인망 어선들이 자주 바닷속을 파헤쳐 주니 오염된 뻘들도 없고 수초도 잘 자라 물고기도 살기 좋았다는 얘기다.

“여그 선창머리도 저녁 먹고 나가믄 민물장어, 참게 같은 게 많이도 잡혔는디, 이젠 눈 씻고 봐도 없어.”

어부는 대형 선단들의 싹쓸이 조업은 그대로 두고 작은 저인망 어선들만 없애 버린 정부 정책에 불만이 많다. 바다에 폐기물이 쌓여 가고 대형 선단이 외해까지 나가 내해로 들어오는 물고기들을 가로막고 싹쓸이하는 것이 바다 가뭄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상 우리 바닷속은 폐그물, 통발, 납덩어리 같은 온갖 해양 쓰레기들이 뒤덮어 썩을 대로 썩었다. 바닷속이 쓰레기 더미에 쌓여 있으니 수초가 자라지 않고 사막화되고 있다. 바닷속은 더 이상 물고기나 해양 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다 가뭄의 책임이 싹쓸이 조업하는 대형 선단들뿐일까! 쓰레기를 버린 어부들도 책임이 있고 이를 방치하고 있는 국가도 책임이 크다.

성게 찜과 생 성게 알 등 귀한 음식 먹는 재미 쏠쏠

예전에 오뉴월 보리 숭어 철이면 어부는 골병이 들었다. 너무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인근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로 차린 섬마을 민박집 백반 밥상.
“숭어 땜에 골병들었소. 얼마나 많이 들었등가. 미어 나르느라 골병들었소. 하루에 두 배씩 퍼나르고.”

이제 그 흔하던 숭어도 귀해졌다. 어부의 그물에는 가끔씩 거북이도 걸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북이가 그물에 들면 어장이 잘 안 된다. “기분이 이상해 부러. 기분이 나뻐.” 거북이는 그물에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다. 바닷속에서는 숨을 못 쉬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북이는 들면 무조건 버렸다. 30㎏ 넘는 대형 거북이도 흔하다. 여름철 적조가 들면 양식업자들에게는 초비상이 들지만 어부는 풍년이다. 태풍 때도 마찬가지다. 태풍을 피해 적조로 답답한 바다를 벗어난 물고기들이 해변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어부는 고기 잡느라 세월이 다 갔다고 탄식이다.
밤송이라고도 부르는 말똥성게는 겨울부터 봄까지가 제철이다.
이제 상차림이 끝났는가 싶었는데 어부의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에서 무언가 꺼내 오신다. 귀한 밤송이(말똥성게) 찜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성게도 한 접시 가득 담아낸다. 혀끝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성게 알. 그 달보드레한 맛은 그저 맛이 아니다. 그리움에도 맛이 있다면 그런 맛이 아닐까. 한국뿐만 아니라 수산물에 식탐이 유난한 일본인도 성게 알을 천하 3대 진미의 하나로 꼽았을 정도니 성게의 가치는 고금이 동일하다.

성게는 세계적으로 900여 종, 한국의 바다에는 30여 종이 서식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보라성게와 말똥성게다. 보라성게는 봄부터 여름까지가 제철이고 말똥성게는 겨울부터 봄까지가 제철이다. 성게는 종류에 따라 식성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바위에 붙어 사는 해초나 고착성 동물을 먹고 산다. 암수 딴 몸인데 잘랐을 때 노란 알만 있는 것이 암컷이고 알 주위로 하얀 액체가 있는 것이 수컷이다.

옛날 기록에는 성게를 해구(海毬) 또는 해위(海蝟)라 했고, 우리말로는 밤송이조개(율구합·栗毬蛤)라 불렀다. 《자산어보》에는 성게를 율구합과 승률구(僧栗毬)로 구분했는데 율구합은 보라성게, 승률구는 말똥성게다. 《자산어보》는 성게가 “맛은 달고 날로 먹거나 국을 끓여서 먹는다”고 했다.

내륙의 도시에서도 성게 알은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지만 성게 알찜을 맛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귀한 고가의 몸이라 생으로도 양껏 먹기 어려운 성게 알을 찜으로 먹을 수 있다니! 섬이 아니면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맛이다. 삶은 성게 알은 고소한 밤 맛이다. 첫맛은 약간 쌉쓰레하지만 이내 쓴맛은 사라지고 달달한 맛이 내내 혀끝을 감돈다.

섬마을 민박집 백반 밥상에 이 귀한 성게 찜과 생 성게 알이 덤이라니! 운이 좋았다. 이 밥상에서는 대합탕이나 해삼 물회도 그저 평범해진다. 섬에서 허름한 어부의 민박집을 찾아들 줄 아는 여행자만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여행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