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눈치보느라…탄력근로 확대·최저임금 개편 좌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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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책 속도조절 '표류'“과속 위험을 느끼고 브레이크를 밟으려던 정부가 뒤차들의 경적에 놀라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있다.”
정부, 노동계 반발에 '親노동 U턴' 조짐
대통령이 약속한 탄력근로제 확대…경사노위서 헛바퀴
'기업 지급능력' 제외…최저임금 개편은 '반쪽짜리' 전락
정부 노동정책에 대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한 공익위원이 한 말이다. 주 52시간 근로제의 급격한 도입에 따른 부작용 해소를 위한 탄력근로제 확대, 2년 새 29% 넘게 오른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을 위한 결정체계 개편 등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 ‘속도조절’마저 노동계 반발에 부딪혀 다시 친(親)노동으로 ‘유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탄력근로제 확대는 허송세월
탄력근로제는 일감이 많은 주엔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대신 일감이 적을 때는 근로시간을 줄여 단위 기간 내 평균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맞추는 제도다. 지난해 7월 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에 주 52시간제 도입과 함께 근로가능 시간이 대폭 축소되면서 핵심 노동 이슈로 떠올랐다. 산업현장에서는 냉·난방기기 제조업체같이 특정 기간 업무가 몰리는 계절산업과 대대적인 정기 보수작업이 필요한 철강·화학업종 등은 현행 탄력근로기간 3개월로는 부족한 만큼 단위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호소해왔다. 산업현장의 호소가 4개월 넘게 이어지자 지난해 11월 5일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는 단위기간 확대에 뒤늦게 합의했다. 처리 시한도 2018년 말로 못박았다.
하지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새 사회적대화기구인 경사노위가 출범하면서 합의는 18일 만에 없던 일이 됐다. “경사노위에 맡겨보자”는 문 대통령의 말에 탄력근로제 확대 처리 시한이 두 달 넘게 늦어졌다.바통을 넘겨받은 경사노위는 허송세월만 했다. 지난해 12월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가 꾸려졌지만 두 달 동안 전체회의는 여덟 차례에 불과했다. 2개월이라는 ‘모래시계’를 받아들었지만 노동계 대표인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탄력근로제와 무관한 이유로 2주 넘게 개점휴업 상태로 만들었다. 한 공익위원은 “사회적 대화 1호 성과물을 내고 싶은 정부만 마음이 급했지 양보해야 하는 노동계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며 “지난 연말에는 국회 상황도 나쁘지 않아 합의대로 실행했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라는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실질 성과는 흐지부지됐다는 설명이다.최저임금제 개편은 ‘반쪽짜리’
정부가 최저임금의 과속 인상을 인정하고 추진하던 최저임금 결정체계·기준 개편도 ‘반쪽짜리’로 전락할 상황이다. 정부가 당초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반영하기로 한 ‘기업의 지급능력’을 막판에 돌연 제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임금 지급능력 반영은 그동안 ‘받는 사람’(노동계) 입장만 고려해온 최저임금 결정기준을 ‘주는 사람’(경영계) 사정도 고려하겠다는 것으로, 지난달 7일 정부가 내놓은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초안의 핵심 내용이다.지금까지 정부는 최저임금 결정에 근로자 생계비, 유사 근로자 임금, 소득분배율 등만 반영해왔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속도 조절을 위해 고용 수준과 경제성장률, 기업 지급능력도 같이 반영하겠다는 정부 초안에 경영계가 반색한 이유였다. 반면 노동계는 정부 초안에 대해 “기업 지급능력은 객관적이지 않은 수치”라는 이유를 내세워 강하게 반발해왔다. 고용노동부 역시 이런 점을 알고 있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그래서 개편안 초안 발표 당시 “(기업 지급능력은)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 통계청의 기업생멸행정통계,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실태조사 등을 활용하면 된다”고 노동계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애써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 초안 발표 이후 노동계 반발이 갈수록 거세지자 정부는 결국 핵심 내용은 쏙 뺀 최종안을 확정해 20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앙꼬 없는 찐빵’이 돼버린 셈이다. 최저임금 결정 기준에서 임금 지급능력이 제외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견된 사안이기도 하다. 고용부는 지난 14일 정부 확정안을 발표하고 곧바로 국회에 이관할 계획이었으나 발표 이틀 전 돌연 “노동계와 관계 부처, 당·정 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며 발표를 미뤘다.
일각에선 처음부터 노동계 반발을 예상하고 추후 폐기할 용도의 ‘협상카드’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편안 초안이 나왔을 때 경영계에서 “정부가 너무 쉽게 의지를 드러내 믿어지지 않는다”며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임금 지급능력 반영을 ‘협상카드’로 넣었던 건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