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걷다가 카약에서 낮잠…자연이 숨쉬는 히로시마

여행의 향기

우리가 몰랐던 '혼슈의 툇마루' 일본 히로시마
히로시마 남동쪽 항구마을 도모노우라 전경.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곳에서 인기 애니메이션 영화 ‘벼랑 위의 포뇨’ 작품을 구상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제공
일본의 혼슈, 시코쿠, 규슈 사이에는 좁은 내해가 하나 있다. 세토 내해라는 이름의 이 좁은 바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오사카, 후쿠오카, 오이타 등과 접한다. 그 사이에 아직 발길이 덜 닿은 보석 같은 여행지 히로시마현이 있다. 보통 원자폭탄 투하지라는 것부터 떠올리지만 알고 보면 고요한 자연과 우아한 미식의 여행지다. 지진이나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편안한 고장으로도 기록돼 있다. 사슴과 사람이 함께 사는 섬, 시간이 멈춘 듯한 숲 테라피 로드, 횃불 축제가 열리는 무인도가 기다린다. 어디를 가나 섬세한 손길이 닿은 정원을 볼 수 있으며, 고요한 정원을 낀 우아한 레스토랑도 많다.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이곳이야말로 자연과 호흡하는 휴식의 고장이라는걸.

눈 많은 히로시마의 진짜 비경 산단쿄 계곡
히로시마 북쪽 산단쿄의 눈 내린 풍경.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해 먼저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정원 산케이엔에 들렀다. 히로시마 공항 부지를 조성하느라 산자락을 깎을 때 나온 돌로 만든 정원이다. 원시림이 우거진 숲과 계곡에 인공 폭포, 인공 호수, 각종 수목을 더했다고 한다. 계절마다 매화, 창포, 수국, 단풍이 눈을 어지럽히고, 연못에선 어른 팔뚝보다 큰 비단잉어가 노닌다. 겨울인데도 표면이 언 연못 아래로 비단잉어가 꼬리를 흔들며 지나는 모습이 마냥 신기하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눈이 한두 송이씩 떨어진다.

“히로시마현은 일본 남쪽 혼슈 지방에 있어 따뜻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겨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옵니다. 일본인도 잘 모르는 사실이어서 히로시마의 눈 내린 산이 아름답다고 하면 놀라고, 스키장이 좋다고 하면 눈이 동그래지죠.” 이번 여행 안내자인 조수희 앤트래블 대표가 설명했다. 그녀와 함께 히로시마 자연의 진짜 속살을 찾아 북서쪽 아키오타 마을로 향했다. 먼저 향한 곳은 16㎞ 길이의 계곡 산단쿄다. 보통 나룻배를 타고 둘러보는데, 배가 다니지 않는 겨울에는 설경이 볼거리다. 장화로 갈아 신고 다리를 조심스레 건너 발이 눈 속으로 푹푹 빠지는 산으로 진입했다. 겨울에도 푸른 나뭇잎들이 살아 있고 그 위로 소복이 눈이 내려앉았다.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숲과 달리 초록과 순백의 숲은 아이러니하게도 포근해 보인다. 차갑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목화솜 같은 폭신함이 연상돼 손을 뻗어 눈송이를 만져본다. 동행 중 누군가는 그 사이 작은 눈사람을 만들기까지 했다.산단쿄에서 서쪽으로 약 6㎞ 떨어져 있는 오소라칸야마에는 작은 스키장이 있다. 마치 강원도의 옛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소박한 스키장이다. 스키장 입구에서 눈사람이나 이글루 같은 집을 만드는 아이들도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놀이터인 설산이 산악인에겐 등반 코스기도 하다. 동행 중 산악 전문가는 그 산을 넘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철저한 장비와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가이드를 동반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서 산악인다운 기상이 묻어났다.

숲길 걷다 카약에 낮잠까지 ‘아키오타 테라피 로드’
산단쿄 계곡의 여름 풍경.
아키오타에는 이 밖에도 여러 산자락을 따라 ‘아키오타 테라피 로드’가 형성돼 있다. 원숭이가 살던 계곡 사루토비와 폭포수가 쏟아지는 류즈코가 인기 코스다. 류즈쿄는 봄에 다녀온 적이 있다. 2년간 전문 교육을 받은 삼림 테라피스트가 동행했는데, 출발 전 혈압을 잰 후 내려와서 비교해보자고 했다. 산에 올라 이끼도 만지고, 열매도 머금으며 걷다가 폭포수 앞에서 명상도 했다. 마지막에는 바람 솔솔 부는 길목에 해먹을 걸고 낮잠을 잤는데 어찌나 개운하던지! 내려와 혈압을 재보니 낮게 안정돼 있었다. “산에서 일정 시간 이상 걸으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건강의 소소한 비밀이 산행에 있는 거죠. 현대인들은 좀더 자주 산을 찾을 필요가 있어요. 이곳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툇마루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머물도록 하기 위해 여름에는 카약을 띄우고, 가을에는 요가 수업도 연다고 그는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사람과 사슴이 함께 사는 섬, 미야지마
미야지마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야생 사슴.
히로시마 남쪽으로 내려가면 자그마하게 웅크린 바다 세토 내해를 만날 수 있다. 크고 작은 섬들 중 가장 유명한 건 미야지마(宮島)다. 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려 선착장을 빠져나가니 곳곳에 사슴들이 보인다. 몇몇은 사람을 탐색하듯 먼저 다가오기까지 한다.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살아온 덕에 이 야생 사슴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관광객은 저마다 사슴 옆에서 함께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사슴들 뒤로는 미야지마의 최대 명소 이쓰쿠시마 신사가 보인다. 6세기 후반 처음 건립됐는데, 13세기 무렵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됐다고 한다. 페리 선이 섬으로 다가올 때부터 많은 사람이 선수의 갑판에 서서 신사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찰 일주문 같은 역할을 하는 신사의 문인 도리이(鳥居)가 물 위에 서 있는 듯 보여서다. 신사 앞 해안가에 건축돼 밀물이 들어오면 부유한 듯 보이는 건데, 특히 만조 때 가장 극적인 장관을 이룬다.

신사 내부를 둘러본 뒤 주변까지 굽어보기 위해 뒷산 미센으로 향했다. 로프웨이를 타고 해발 535m 높이에 오르니 눈발이 산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휘날린다. 뿌연 시야에 가려진 산 아래 풍경이 베일을 두른 듯 신비롭다. “가을에 오면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볼 수 있어요. 그 시기에는 여행자가 부쩍 늘어나죠. 하지만 발길이 드문 설산도 아름답지 않나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클라이맥스를 지나고 난 설산에 더 애정이 간다.무인도를 지키는 료칸에서 하룻밤, 센스이지마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도리이.
히로시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동쪽의 항구마을 도모노우라에 들렀다. 19세기의 석조 등대가 지키는 오래된 항구 마을이다. 목조 건축물이 남아 있는 이 예스러운 마을에서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햐야오가 ‘벼랑 위의 포뇨’를 구상했다고 한다. 이곳 선착장에서는 둘레 5㎞의 작은 무인도 센스이지마로 배가 다닌다. “섬에 거주자는 없고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만 들어서 있어요. 관리 직원들이 저녁 배로 육지에 돌아가면 그야말로 여행자만 무인도에 남는 거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도모노우라 골목길.
섬마을 료칸은 식당부터 남달랐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로에 전복, 문어, 오징어, 새우, 생선을 구워 먹을 수 있다. 요리사가 손님들을 주방 앞으로 불러 모아 갓 잡은 갯가재를 구워주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둠을 밝혀줄 등불과 온기를 더하도록 덥힌 돌주머니를 건넸다. 료칸의 방에 들어갔을 때는 바깥바람이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위쪽의 작은 창들은 문이 달려 있지 않고 바람이 통하는 형태였다. 서늘한 한기에 잠들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잠시, 깊은 잠을 잔 뒤 찾아온 아침에는 온몸이 이상하리만치 개운했다. 마치 야생의 벌판에서 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달까. 어쩌면 창 너머로 전해오던 바람과 파도 소리 때문이었을지도.

히로시마=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여행정보인천 공항에서 히로시마 공항으로 직항이 있다. 에어서울이 운항하며, 비행 시간은 약 1시간35분 걸린다. 시내에는 히로덴이라 불리는 전차를 비롯해 전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이 다닌다. 숲과 섬을 볼 수 있는 외곽은 대중교통이 없고 영어가 잘 안 통해 전문 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현지 여행사 중에서 예약부터 현지 투어까지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는 앤트래블도쿄가 있다.

미야지마는 JR미야지마구치 역 앞 ‘미야지마 페리 승선장’에서 페리선으로 10분이면 닿는다. 센스이지마는 도모노우라 선착장에서 작은 페리 선으로 5분 만에 닿는다. 센스이지마의 료칸 코코카라에는 장작으로 데우는 한증탕, 바닷물 목욕탕, 모래찜질 체험 등이 있다. 운영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미리 문의하는 것이 좋다. 히로시마 여행정보는 일본정부관광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