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ㅣ '사바하' 박정민 "멋있는 역할요? 언젠간 할 날 오겠죠"
입력
수정
영화 '사바하' 나한 역할 배우 박정민박정민(33)은 또래 배우들 중 가장 돋보이는 필모그라피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다. 2011년 영화 '파수꾼'으로 강렬하게 등장한 후 20016년 개봉한 '동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각종 시상식 신인상을 휩쓸었다. 이후 '그것만이 내 세상', '변상'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다채로운 연기 변신을 선보여왔다. 신인 시절 배우가 되기 위해 고려대 인문학부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이력이 화제가 됐지만, 이제 온전히 연기력만으로 인정받을 만큼 배우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구축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선배들에게도 칭찬이 자자한 박정민이었다. 이번 영화 '사바하'에서는 비밀을 간직한 청년 나한 역을 맡아 다시 한 번 탄탄한 연기 내공을 뽐냈다.
'사바하'는 영화 '검은 사제들'로 구마의식을 한국적으로 풀어내며 550만 관객을 동원했던 장재현 감독의 신작이다. 신흥 종교 집단을 쫓던 박목사(이정재 분) 앞에 나한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전행되는 스릴러다. 박정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중저음의 목소리, 그와는 상반된 노란색으로 탈색한 머리로 극을 종횡무진하며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영화가 공개된 후 "역시 박정민"이라는 호평이 이어졌지만, 정작 본인은 쑥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인터뷰에 응했다. "이전까진 언론 시사회에선 '내가 잘했나, 못했나'에 집중하느라 제 연기 보기에 바빴어요. 그런데 '사바하'는 온전히 이야기에 몰입했어요. 이런 건 처음인 거 같아요. 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응원하면서 봤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인 거 같습니다."극중 나한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지만, 그 때문에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영화의 주제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존재해서 이것이 생겨났다"는 메시지는 나한 그 자체로 설명이 가능하다. 차량 정비공이라는 직업도, 항공 점퍼에 정비 트럭을 몰고 다니는 겉모습도 나한의 실체를 가리는 위장술이었다. 특히 강렬한 노란 머리에 대해 박정민은 "원래는 스포츠 머리를 하려고 했었다"면서 뒷이야기를 전했다.
"'변산'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사바하'에 들어갔어요. 그땐 살짝 곱슬머리라 머리를 자르고 싶어서 '스포츠 머리로 가면 안될까요?' 여쭤봤는데, 자르지 말고 염색을 하고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노란 머리엔 두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진화된 위장술이에요. 잡범에 가까운 모습을 한 이 아이가 설마 살인을 하고 돌아다니겠냐, 이렇게 보여주는 거죠. 또 하나는 박목사와 대비에요. 둘이 같은 팀처럼 보이면 안되잖아요. 색을 다르게 써서 이미지를 잡았죠."장재현 감독의 전작 '검은 사제들'에서는 강동원이 사제복 신드롬을 일으켰고, '사바하'에서 이정재는 명품으로 멋을 내고, 외제차를 운전하며 스타일리시한 목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나한은 항상 항공 점퍼에 작업복 차림이었다. 박정민에게 "더 멋을 내고 싶진 않았냐"고 물었다.
"의상은, 전 주는 데로 입어요. 멋있는 역할, 로맨틱 코미디 이런 건 제안을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런 역할은 잘 안 맞고, 안 죽는데, 저는 일단 시작할 때부터 몇 대 맞고 가는거 같아요. 이젠 이게 팔자인가 싶고요.(웃음) 제가 그런 대사, 행동들을 연기할 때 오글거리지 않고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한데,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겸손하게 말했지만, 박정민은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명이다. 욕심도 많고 찾는 곳도 많다 보니 촬영 스케줄도 빡빡하게 이어지고 있다. '사바하'에도 가장 늦게 합류했다. 그렇게 영화 '변산' 촬영을 끝내고 하루도 쉬지 못하고 '사바하'에 왔다. 박정민의 연기에 찬사가 이어졌지만, 그는 장재현 감독이 시사회에서 눈물을 보이며 "피를 토하고 뼈를 깎으며 준비했다"고 말한 것을 언급하며 "저는 받아들일 준비가 다 돼 있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자, 시작!' 했을때, 다 같이 출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제 나름대로 많이 연구하고, 감정도 잡는다고 했는데 그게 안됐더라고요. 이런 장르가 처음이다보니 장면 안에서 긴장감을 조성한다던지, 그림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지도 잘 몰랐어요. 배워가면서 촬영했어요. 금화(이재인 분) 집에서 금화를 찾을 때에도, 저는 여기저기 보면서 했는데, 감독님은 딱 한 번보고 그냥 나가더라고요. 나중에 현장 편집본을 보니 감독님이 하시는 게 맞았어요. 제 연기는 지저분하더라고요. 감독님 말을 충실하게 듣자고 다시 느꼈죠."
극중 나한은 박목사가 쫓는 신흥종교 단체 사슴동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사슴동산은 불교에서 파생됐다. 석가모니를 믿게 되면서 착하게 살기로 마음 먹은 악신 사천왕을 신으로 모신다. 불교와 기독교가 각자의 길을 가며 신의 존재라는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는 '사바하'다. 하지만 정작 박정민은 종교가 없다. 자칫 어렵거나 낯설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박정민은 "그 낯선 느낌이 좋았다"고 말했다.
"교회는 군대 있을 때 열심히 다녀봤지만 종교는 없어요. 불교도 절에 가서 염주 사서 차고, 절하는 정도만 할 줄 알 지 다른 건 몰라요. 그러다보니 영화에서 보여지는 불교적인 세계관이 정말 낯설고 새롭더라고요. 이건 일반적으로 살인자가 누군가를 쫓아 죽이고, 그 사람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른 세계관이 구축돼 있죠. 그래서 더 끌렸어요."'사바하'에서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소재로 동물들도 여럿 등장한다. 박정민이 촬영장에서 우스갯 소리로 "'신비한 동물 사전'이랑 맞붙으면 안된다"고 말하자, 장재현 감독이 "동물은 우리가 더 많이 나와"라고 받아친 일화도 있었다. 사슴, 코끼리, 뱀 등의 동물은 CG로 구현해 냈다. 그 외에 개, 새 등이 직접 등장했던 장면은 "정말 소중하게 그들의 컨디션을 챙겨가면서 촬영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정작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은 CG없이 촬영됐다. 나한이 악몽에 시달리며 귀신을 보는 장면 역시 직접 검은 분장을 한 아이들을 와이어에 메달고 찍었다.
"얼굴은 하얗게 하고, 피를 묻히는 분장을 하는 거에요. 촬영을 하면서도 좀 무서웠어요. 집에가서 '아, 씨' 하는 이런 느낌이랄까요.(웃음) 그런데 애들은 좋아하더라고요. '한 번만 더하자' 이러면 까르르 웃으면서 '네'하고요. 나중에 와이어줄만 CG로 지웠어요. 영화로 봐도 무섭더라고요."많은 고민을 했고, 열심히 촬영했지만 개봉 직전엔 신천지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박목사가 신흥 종교단체를 소개하며 "내가 강원지역 신천지를 조사하면서 알게된 건데"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신천지 자체를 문제가 있는 신흥 종교단체로 묘사한 건 아니었지만, 당사자 측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해 후시 녹음(後時 錄音)을 다시 해 개봉 버전에선 빠져 있다. 박정민은 "논란이 됐던 부분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면서 "시나리오를 볼 때에도 못 느꼈는데, 일단 오셔서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저희 영화는 해석의 범위가 넓진 않아요. 그럼에도 각자의 캐릭터들에 자신만의 고민을 대입해서 감정을 이입할 순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본다면 '사바하'가 던지는 메시지는 다 다를 수 있어요. 그 안에 영화의 소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재밌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를 보고, 유튜브로 해석을 찾아보기 딱 좋은 영화에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