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차가운 머리로 '완벽한 비핵화' 이뤄야

"核은 光復이란 희망 안겨줬지만
北核은 파멸·절망의 문 열 수도
멀고 먼 길 끈기 갖고 대처해야"

김도연 < 포스텍 총장 >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미국 정부는 맨해튼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핵폭탄 개발에 나선다. 4년간의 프로젝트 수행에 약 20억달러가 소요됐는데, 이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250억달러(약 30조원)에 해당한다. 참고로 우리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1년 예산은 올해 처음으로 20조원을 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스물네 살에 칼텍(Caltech)과 버클리(Berkeley) 두 대학 교수로 임용돼 가르치고 연구한 과학자였다.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별칭으로 역사에 남았는데 자신은 스스로의 업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1945년 7월 16일, 원폭에 대한 최종 시험에 성공했다. 1만m가 넘게 치솟은 버섯 형태의 불꽃을 보면서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이들은 성공의 기쁨과 더불어 대단히 착잡해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그날의 기분을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는 것 아닐까”라고 표현했다. 최종 시험의 현장책임자는 좀 더 직접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리는 정말 개만도 못한 놈들이다”라고 말했다. 지켜 본 사람들에게 핵폭탄은 이처럼 엄청난 공포 그 자체였다.

20여 일 후인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역사를 바꾼다. 폭발 순간 바로 사망한 사람만도 7만여 명, 그리고 투하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3㎞ 이내의 모든 것이 단숨에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으니 결국 우리의 삶도 오펜하이머가 크게 바꾼 셈이다.

2차 대전 종료 후, 더 이상의 핵폭탄에 강력히 반대한 오펜하이머는 훨씬 더 위력적인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하던 미국 정부에 걸림돌이 됐다. 게다가 6·25전쟁 등으로 정치적 상황도 급격히 우경화되면서 오펜하이머는 50세 나이에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과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과학은 정말 아름답다”고 이야기한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불우하게 삶을 마치며 전설이 됐다.그후 80여 년이 지나면서 현재의 핵폭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을 갖게 됐다. 리틀 보이가 지녔던 파괴력의 5000배에 이르는 것을 포함, 인류는 현재 약 1만5000개의 핵폭탄을 지니고 있는데, 90% 이상은 미국과 러시아의 것이다. 나머지는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에 있으며 이스라엘도 100여 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단히 불편한 진실은 우리와 군사적으로 대치해 온 북한이 핵폭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하나의 국가로서는 비정상적이라고 분류할 수밖에 없는 북한이 핵폭탄을 지니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백척간두에 서게 됐다. 사실 이는 모든 인류가 마주한 어려운 문제다.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마주 앉아 이야기하게 된 것 자체가 핵폭탄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만약 오펜하이머가 살아 있다면 그는 북한의 핵개발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가 힘들게 찾아낸 원폭의 비밀 열쇠를 넓은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 버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 열쇠는 우리에게 815 해방이란 희망의 문을 열어줬지만 이제는 파멸과 절망의 문을 열 수도 있기에 남북한 간 혹은 미·북 간 비핵화 회담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이슈다.그러나 회담의 주제부터 ‘북한 비핵화’ 혹은 ‘한반도 비핵화’로 근본을 서로 달리하고 있기에, 순조로운 회담은 쉽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멀고도 먼 길일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는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로 끈기를 갖고 완벽한 비핵화를 추진하기 바란다. 오펜하이머가 이야기한 대로 원자폭탄은 죽음의 신이다.

dohyeonkim@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