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쏙 뺀 최저임금 개편안…정부, 노동계 반발에 또 꼬리내렸다

'반쪽짜리' 최저임금 개편안

中企·자영업자 분통
"말 바꾼 고용부 비판받아야"…내년 최저임금 인상률에 큰 영향
우려가 현실이 됐다.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포함하기로 했던 ‘기업 지불능력’을 제외한 것은 정부가 그동안 개편안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는 과정에서 이미 예견됐다. 정부는 당초 지난 14일 발표를 예고했다가 노동계 반발과 탄력근로제 확대 협상 차질을 우려해 20일로 한 차례 연기했다. 이마저 발표를 미룬 뒤 결국 27일에야 정부안을 확정했다. 정부가 지난 2년간 29.1% 올린 최저임금 ‘과속’을 인정하고 뒤늦게 속도조절에 나섰지만 노동계 반발에 막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이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최저임금 체계 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차례 연기 끝에 내놓은 정부안고용부가 이날 발표한 최저임금제 개편안은 현행 단심제인 최저임금 결정 구조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고, 그동안 근로자 생계비, 소득분배율 등만 고려했던 결정 기준에 ‘고용에 미치는 영향’ ‘경제성장률’ 등을 추가하는 게 골자다.

전문가로만 구성되는 구간설정위원회는 노·사·정이 각각 5명을 추천하고, 노·사가 상대방 추천위원을 3명씩 배제해 총 9명으로 꾸려진다. 구간설정위원회가 심의구간을 정해주면 이듬해 최저임금을 결정하게 될 결정위원회는 노·사·공익위원 7명씩 21명으로 구성된다. 이때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는 공익위원은 정부가 3명, 국회가 4명 추천한다. 당초 정부안에는 정부가 4명, 국회가 3명 추천하기로 했으나 정부 몫을 한 명 줄이고 국회 몫을 늘렸다. 임서정 고용부 차관은 “국회에 제출된 최저임금법 개정안 상당수가 공익위원의 국회 추천권을 강조하고 있다”며 “다양성이 더 확보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구간설정위원회는 새 결정기준에 따라 연중 상시적으로 통계분석, 현장 모니터링 등을 통해 심의구간을 설정하도록 했다. 결정위원회 노·사 위원은 현행과 같이 노사단체 추천을 받아 위촉하되 청년, 여성, 비정규직, 중소·중견기업 및 소상공인 대표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명문화했다.
지불능력은 제외…‘반쪽짜리’ 개편

이번에 확정된 개편안과 정부가 지난달 7일 내놓은 초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정기준에서 ‘기업 지불능력’이 빠진 것이다. 기업 지불능력은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을 위한 제도 개편의 핵심이다. 개편안을 두고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지불능력을 제외한 것에 대해 경제성장률 등 새로 추가된 결정기준으로 보완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임 차관은 “지불능력은 다른 결정기준과 중복되는 측면이 있고 객관성·구체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며 “초안에서 제시했던 ‘고용수준’을 ‘고용에 미치는 영향’으로 변경해 보완할 수 있다”고 했다.하지만 노동계가 지불능력을 포함하는 데 대해 강력 반발해 왔다는 점에서 이를 의식한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노동계 반발은 고용부도 일찌감치 예상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이 개편안 초안 발표 당시에도 “(기업 지불능력은)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 통계청 기업생멸행정통계,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실태조사 등을 활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중앙회와 소상공인연합회는 즉각 반발했다. 두 단체는 성명에서 “영세기업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만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온 나라의 관심이 북·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을 때 슬그머니 말을 뒤집는 고용부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내년 최저임금 8월 이후 결정될 듯정부 개편안이 3월 임시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에 착수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전망이다. 노사단체가 각 위원을 추천하고 배제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데다 정부 외에 국회까지 위원을 추천하기 때문이다. 현행 최저임금법은 매년 8월 5일까지 다음해 적용할 최저임금을 최종 결정하고 고시하도록 돼 있다.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을 지낸 한 노동분야 전문가는 “결정구조가 이원화되면서 갈등 소지가 커지고 물리적인 소요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올해는 시한 내 고시를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도 임금협상에 나서야 하는 기업은 물론 정부도 예산 편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정기준에서 지불능력이 배제됨에 따라 최저임금 인상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결정구조 개편 자체를 반대하는 노동계는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늦추려 한다”며 반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노동계 입김이 작용해 인상률이 8%대만 돼도 내년 최저임금은 시급 9000원을 넘게 된다. 영세·중소기업은 내년 최저임금 결정이 늦어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에다 고율 인상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백승현·김진수 기자/최종석 전문위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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