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마중물' 된 민족기업들…임시정부 자금 대주고 항일조직 운영
입력
수정
지면A7
3·1절 100주년3·1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기업인들도 이에 동참했다.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이 무렵 태동한 민족 기업들은 ‘외세에 맞서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는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주역이 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대에 앞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인들을 찾았다.
기업들 독립운동 후원사
LG 구인회·GS 허만정 창업주, 가문 몰락 무릅쓰고 자금줄 역할
두산 창업주는 국채보상운동 참여
허만정 GS그룹 창업주의 눈에 비친 3·1운동 현장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양민들을 학살한 일제의 잔인함은 22세 청년의 머릿속을 ‘어떻게 해야 이런 치욕을 씻어낼 수 있을까’로 가득 채웠다. 그가 내린 결론은 ‘배움’이었다. “무지(無知)를 씻어내지 못하면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재산을 투입, 고향인 경남 진주에 일신고등보통학교(1920년)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1925년)를 세웠다. 허 창업주를 비롯한 상당수 기업인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숨은 조연’으로 평가받는 이유다.독립운동 자금 댄 LG와 GS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사돈인 허 창업주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 자금을 댄 대표적인 재계 인물로 꼽힌다. 시작은 구 창업주가 진주에서 구인상회란 포목상을 운영하던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며 불쑥 찾아온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1만원을 건넨 것. 당시 80㎏짜리 쌀 500가마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백산 선생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발각되면 구씨 집안이 풍비박산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 창업주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살리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며 용기를 냈다.허 창업주 역시 임시정부의 자금줄 역할을 한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군의 은행’으로 불리던 백산상회 초기 주주 32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 기업가로 활동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도입한 차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1907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모금 운동이다. 1944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위해 청년 징용에 나서자 이들을 취업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구해내기도 했다.독립운동에 헌신한 기업도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케이스다. 중앙고보(현 중앙고) 재학 시절인 1926년 순종 서거로 촉발된 6·10 만세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조 창업주는 이후 광복 때까지 고향에서 야학활동 등을 하며 면장 등을 맡아달라는 일제의 부역을 거부했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는 독립을 위해 ‘특수공작원’ 임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군 전략정보처(OSS·CIA의 전신)가 추진한 ‘냅코’ 작전의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됐다. OSS가 반일의식이 투철한 한국인에게 특수공작훈련을 한 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키려 한 이 작전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동화약품 창업주 가운데 한 명인 민강 초대 사장도 ‘대놓고’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회사에 ‘연통부(상하이 임시정부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활명수를 판매한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댔다. 수차례 이어진 옥고로 민 사장은 1931년 별세했고, 사세는 기울었다. 1937년 회사 지휘봉을 물려받은 윤창식 사장도 토착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재계 관계자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이 당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일제에 맞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일부 기업인이 보여준 독립정신은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오상헌/김보형/양병훈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