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밀한 호흡으로 완성시킨 관계의 밀도…연극 '자기 앞의 생'
입력
수정
지면A28
리뷰연극에서 캐릭터 간 관계의 밀도는 공연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다. 특히 캐릭터 수가 적을수록 그렇다. 구성, 장치보다 캐릭터에 관객의 관심이 더 집중되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의 ‘자기 앞의 생’은 이런 점을 잘 살려 캐릭터 간 밀도를 최대한 끌어올린 작품이다.
공연은 지난달 22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프랑스 문학 거장 로맹 가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프랑스 희곡작가 자비에 제이야르가 각색해 2007년 초연했다. 국내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억울한 여자’ ‘신의 아그네스’ 등을 만든 박혜선이 연출을 맡았다.작품은 나이 든 보모 로자,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이후 로자의 손에서 큰 14세 소년 모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인물은 10년 넘게 온전히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살았다. 의사, 모모의 친아버지까지 총 4명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사실상 2인극에 가깝다. 그래서 둘만의 밀도가 매우 중요하다.
캐릭터 간 밀도는 먼저 대본에서의 설정과 대사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는 것은 연기자끼리의 호흡이다. 이 공연은 이를 모두 충족시켰다. 우선 대본이 소설보다 더 유연하고 유쾌하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았다. 대화 속에 자주 나오는 인종, 종교 등 복잡한 얘기도 관객에게 가볍게 전달됐다. 그래서인지 둘의 관계가 다른 사회적 요인과 전혀 상관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호흡은 밀도를 더욱 높였다. 로자 역엔 배우 양희경, 이수미가 더블 캐스팅됐다. 모모 역은 오정택이 맡았다. 지난달 열린 프레스콜에서 1부는 이수미, 2부는 양희경이 연기했다. 둘은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을 풍겼다. 이수미에게선 경쾌한 느낌이, 양희경에게선 깊고 짙은 감성이 묻어났다. 오정택의 연기도 탁월했다. 33세인 그는 10대 소년의 나이에 맞는 발성과 몸짓을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로자와 모모의 호흡은 긴밀하게 이뤄졌다. 로자 역의 두 배우는 극의 중심을 잘 잡아갔고, 모모는 톡톡 튀면서도 안정적인 모습으로 균형을 맞췄다.다만 영상 활용이 다소 아쉬웠다. 과거 또는 꿈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무대 세트에 영상이 흘렀다. 극의 중간까지는 괜찮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선 조금 과해 보였다. 두 사람의 행복했던 순간을 영상에 담았는데, 극 전반에 걸쳐 관계를 빼곡하게 쌓아올린 만큼 굳이 반복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다. 공연은 오는 23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