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위기 딜레마'에 빠진 정부

"'경제위기론=음모론' 규정으로
성장률 추락 사전 대응 취약해져
'비상경제대책회의' 각오 필요"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마지막 날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의 송년 오찬에서 “우리 사회에 ‘경제 실패’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수구 보수 세력이 경제위기론을 퍼뜨리고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경제위기론을 보수 기득권층의 이념·이해·이익 동맹, 곧 ‘음모론’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 성장률을 예상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성장률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면 정권 지지 세력으로, 비관적으로 전망하면 정권 반대 세력으로 분류될지 모르기 때문이다.국제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올해 한국의 성장률이 2.1%로 추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 전망치 2.6~2.7%보다 크게 낮고, 정부가 경제위기가 아니라며 종종 인용하는 잠재성장률조차 한참 밑도는 수준이다. 무디스가 국내기관이었으면 영락없이 수구 보수 세력으로 낙인찍혔을 전망치다.

기획재정부가 나섰다. “기관 간 컨센서스(추정치 평균)와는 동떨어진 전망”이란 반응을 내놨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무디스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성장률 전망치(2.3%)를 떠올리면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당시 근거로 제시했던 대외적인 글로벌 무역 감속, 최저임금 등 국내 정책요인으로 인한 투자 위축과 고용 악화에,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수출 부진이 더해진 것이어서 메시지의 일관성이 있다.

컨센서스도 상황에 따라 이동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한국의 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하는 해외기관이 늘고 있고, 국내에서도 일부 민간기관들이 무디스 전망에 용기(?)를 내 당초 예측치를 수정하려는 기류가 엿보인다.걱정되는 건 경제위기론을 수구 보수 세력의 이념 동맹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힌 정부 여당이다. 경제위기 징후가 나타나도 정부 여당은 위기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됐다. 누가 사주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판단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붕괴 과정으로 봤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자본주의 경제는 위기를 먹고 살아왔다. 붕괴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위기가 없다고 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였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파산 등 치러야 할 비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경험했다. 하지만 위기의 편익도 있다. 비효율을 제거하고 새로운 발전 경로를 개척할 기회, 위기 대응능력을 높이는 학습효과 등이 그것이다.여기서 ‘경제위기론의 효용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학습효과를 발휘해 ‘사전 대응’으로 경제 위기가 실제로 닥쳤을 때 예상되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대신 ‘편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다. 그러나 이는 경제위기 징후들이 나타나면 정부가 먼저 국민에게 알리고 경제정책, 경제시스템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실용적인 정부라야 가능하다.

정부가 경제활력 대책, 수출 대책, 제2 벤처 붐 정책 등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권 초부터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여기에 위기 징후가 나타나도 정부는 위기가 아니라고 반박해야 할 판국이니 이런 대책들이 힘을 받기도 어렵게 됐다. 미·북 정상회담 합의 결렬이 경제에 무슨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상황이다. 위기가 감지되면 지지층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에게 노동 리스크 해소, 규제개혁, 혁신성장 등이 절박하다고 해야 하는데, 위기가 아니라는 정부의 호소가 제대로 전해질지도 의문이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길은 정부가 지금이라도 위기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뿐이다. 정부가 먼저 말해야 한다. 올해 우리 경제가 고용·투자·수출 위축 등으로 매우 어려운 국면이 예상된다고. 미세먼지와 관련해 “비상한 시기엔 비상한 조치를 취하는 게 정부의 책무”라고 한 대통령이 경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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