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인터뷰]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 "파산신청 사상 최대…맞춤복 같은 서비스로 기업회생 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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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회생 사령탑' 맡은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법원 중 하나가 국내 유일의 도산 전문법원인 서울회생법원이다. 경기 부진으로 한계상황에 내몰린 기업과 가계가 늘고 있어서다. 지난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기업은 807곳, 회생을 신청한 기업은 980곳으로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3년 연속 감소하던 개인 도산 사건도 지난해 13만4602건으로 다시 증가세다.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은 취임 첫 일성으로 직원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회생법원 방문자들을 열린 마음과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임기 내 최우선 목표로 “지난 10년의 도산 사건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채무자들에게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4일 서울회생법원장에 취임한 정 법원장을 서울 서초동 서울회생법원장실에서 지난 6일 만났다.
"지난 10년간 회생·파산 3000건 전수 조사해 DB화
파산 선고 경찰·교사도 빚 갚으면 복직할 수 있어야"
▶지난해 도산한 기업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가장 큰 건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비용은 늘어나는데 매출은 증가하기 어렵습니다. 대기업이 흔들리니 관련 협력업체들까지 연쇄적으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 와중에 은행들은 대출 조건을 더 바짝 죄고 있고요. 법원 일감은 많아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습니다. 법원이 한가할수록 사회는 건강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업종의 도산이 많습니까.
“저희가 따로 통계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의류와 패션, 철강, 자동차 부품 제조 업종을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게 일선 판사들의 얘기입니다. 국민의 씀씀이가 많이 줄어든 분야거나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수년 전부터 고전해온 업종들이죠. 올해는 회원제 골프장의 회생 신청도 늘어날 전망입니다. 대법원이 골프장을 공매나 수의계약 할 때도 기존 회원권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에 회생절차를 거쳐 채무를 조정하려는 곳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법원이 분석한 통계가 없나요.
“서울회생법원이 도산 전문법원으로 출범한 지 이제 만 2년이 됐습니다. 과거 사건들을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안에 그동안 쌓인 기업 사건을 전수조사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난 10년간 누적된 회생·파산 2951건을 산업, 채무액수, 채권 종류, 종업원 수 등으로 분류한 뒤 회생 종결까지의 기간, 특이사항, 회생계획 수행 등을 분석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 법원을 찾은 채무자에게 ‘기성복’을 팔았다면 이제는 특성에 꼭 맞는 ‘맞춤복(맞춤형 도산 절차)’을 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부나 민간 기업들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겠지요.”
▶회생보다 파산을 위해 법원을 찾는 기업이 더 많아졌습니다.“2017년 설립 당시 이름을 ‘파산법원’이 아니라 ‘회생법원’으로 붙인 건 기업을 살리는 데 방점을 찍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해부터 법인 파산 신청이 회생 신청 건수를 넘어섰습니다. 회생절차를 밟을 수 없을 정도로 기반이 붕괴된 채 법원을 찾는 기업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죠. 아직 회생 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위기에 처한 회사들이 신속하게 법원을 찾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회생절차가 개시됐다고 하면 당장 망하거나 부도가 난다는 인식이 많으니까요. 은행 대출부터 바로 막히지 않습니까.”
▶법원에 의한 회생절차는 신규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어 기업들이 꺼리는 것 같습니다.
“기업 회생에 투입된 신규 자금에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도산 제도가 가장 발전한 국가 중 하나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회생절차 기업에 자금을 융통하는 DIP파이낸싱(debtor in possession financing) 제공자에게는 우선회수권과 고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도 벤치마킹할 수 있습니다. 입법 사항이기 때문에 관련 학회와 국회 등에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합니다.”▶지난해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 통과될 때 부대의견으로 통합도산법과의 일원화가 거론됐는데요.
“어색한 동거를 해결해야죠. 기촉법에 의한 워크아웃은 장점이 많은 제도지만 관치 금융의 부작용이나 재산권 제한으로 인한 위헌 요소 등이 있습니다. 통합 작업은 금융위원회 주도로 하고 있는데 속도가 잘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스크포스(TF)를 먼저 구성해야 하는데 구성원으로 금융권, 기업, 법원 인사 몇 명이 들어갈 것인지부터 이견이 있습니다. 우리 법원도 다음달 예정된 법관 워크숍에서 논의를 거친 뒤 조만간 공식 입장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파산 등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구상하고 있는 제도가 있습니까.
“2년 전 서울회생법원이 생기고 나서 자율 구조조정 지원(ARS) 프로그램, P-플랜(잠재적 인수후보자를 포함한 회생계획안을 짜 법정관리 기간을 단축하는 프로그램), S-트랙(중소기업 전용 회생절차) 등 다양한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일부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우선은 기존 제도들을 충실히 운용하면서 불필요한 제도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력이 생긴다면 추가적으로는 도산 절차에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대체적 분쟁 해결) 도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사 절차와 마찬가지로 도산 절차에서도 당사자들 간 합의로 채무 재조정을 하는 거죠.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에서 활용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채무자와 채권자 간 합의를 통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기업들에 일부 관리위원이 고압적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경제신문에서 지적한 기사를 저도 읽어봤습니다. 관리위원들이 대부분 금융권 등에서 온 전문가 출신이고 연령대가 높다 보니 과거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한경 보도 이후 법원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했습니다. 관리인들의 면담 신청은 모두 재판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자체 평가를 통해 3년마다 재위촉 여부를 결정토록 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신경쓰겠습니다.”
▶개인 도산 신청자는 어떤 사람들이 많나요.
“경제적 곤란을 겪는 채무자들이 전 연령대에 분포돼 있습니다. 청년실업이 늘어나고 금리 인상으로 금융비용 부담이 증가한 것 등을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개인 도산 제도에도 신경을 쓸 겁니다. 예컨대 파산선고를 받은 경찰관이나 교사는 이후의 채무 해결 여부와 관계없이 복직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불합리한 규정을 없애는 방향으로 올해 입법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지난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재판장을 맡았습니다.
“그 판결이 있고 나서 저를 파면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넘겼습니다. 20만 명이면 웬만한 도시 인구 아닙니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법관 생활만 30년이나 된 고등법원 부장판사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한참 후배들인 지방법원 부장판사나 평판사들은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요즘 법정에 들어갈 때마다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젊은 판사들을 만나면 안타깝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많은 법관이 기소됐습니다.
“잘못한 사람과 행위에 대해선 얼마든지 비판해 마땅합니다. 다만 그것이 법관 전체, 사법부 전체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불신으로 번져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판을 받게 될 국민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절대다수의 판사들이 일선에서 묵묵히 각자 소신을 갖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사태가 정쟁의 도구로 그만 사용됐으면 합니다.”■정형식 법원장은…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58·사법연수원 17기)은 법조계에서 형사재판 전문가로 통한다. 지난해 서울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의 항소심을 맡았다. 그는 이 부회장에게 실형을 내렸던 1심을 뒤집고 “기업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요구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항소심과 이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항소심도 정 법원장의 재판장을 거쳐갔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 전 총리에게는 1심(무죄)을 뒤집고 징역 2년(추징금 8억8000만원)을 선고했다. 저축은행 비리 연루 의혹을 받았던 이 의원은 무죄로 판단했다.
법조계에서는 정 법원장이 31년간 재판을 맡으면서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판결을 내려왔다는 평가가 많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던 2015년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선정한 전국의 우수법관 명단(8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변호사들은 정 법원장에게 100점 만점에 95점 이상의 점수를 줬다.
정 법원장의 사무실에는 민일영 전 대법관이 직접 쓴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란 글귀가 걸려 있다. 눈 덮인 들길을 걸을 때 생기는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는 의미의 글이다. 민 전 대법관과는 동서지간이다.△1961년 강원 양구 출생
△서울고, 서울대 법대 졸업
△1985년 27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17기)
△1988년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
△200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2004년 청주지법 수석부장판사
△2007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2014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19년 서울회생법원장
박종서/신연수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