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이슬람권 親中脫美, 헤게모니 이동의 신호탄?

미국의 분할 정책에 속수무책이던 중동
사우디와 쿠웨이트까지 親中행보 강화
트럼프에 대한 신뢰 상실 예의주시해야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
“트럼프의 미국이 위험하다.” 미국 국내외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진단이 쏟아진다.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탄핵을 부르는 국내 정치 위기에 더해, 전통적인 친미(親美) 국가였던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물론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까지 중국과의 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나섰다.

중동·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생적으로 반미(反美) 정서가 강하다. 중세 1000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이슬람 문명이 도리어 최근 200년간 서구문명에 뒤지면서 모든 이슬람 국가가 유럽의 가혹한 식민지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고 정의는 항상 가진 자의 논리’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대부분 이슬람 국가는 서구와의 무모한 대결보다는 역사적 분노를 억누르고 타협을 통해 실리적 국익을 취해왔다. 적대국인 이스라엘과도 소모적 대결 대신 어정쩡한 현상 유지 노선을 지속해왔다. 무엇보다 국부의 원천인 석유를 서구에 수출해온 아랍 왕정국가들의 친미 노선은 확고했다.비(非)산유국인 요르단, 모로코 같은 왕정국가나 튀니지, 이집트, 알제리 같은 독재국가도 친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미의 선봉에 섰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8년째 내전에 휩싸여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란은 40년째 미국의 경제제재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반미는 실패했고, 이를 토대로 미국은 지난 50년간 이스라엘을 지렛대로 중동에서 안정적인 국익 극대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경쟁자 러시아도 중동에서만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한껏 변화의 기대를 모았던 2011년 ‘아랍의 민주화 시위’마저 실패하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동 분할을 가속화했다. 시리아, 예멘, 리비아를 내전으로 몰고가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상황으로 묶어뒀다. 긴밀한 왕정동맹이던 사우디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사이를 완전히 갈라놨으며 사우디와 이란 사이도 일촉즉발의 적대관계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화해 불가능하게 보이던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협력관계가 급진전되면서 이란에 맞선 양국 군사동맹까지 논의되는 지점에 왔다. 누가 봐도 미국의 승리였고 ‘아메리카 퍼스트’의 위대한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런데 최근 이런 움직임에 균열이 나타났다.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와 아사드 정권이 우위에 서서 미국의 퇴각을 압박하고 있고, 사우디와 쿠웨이트도 미국 의존도에서 벗어나 친중국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사건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대한 미국 의회나 언론의 공격에 사우디 왕정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느껴왔다. 미국에 사우디 운명을 올인할 수 없다고 판단한 무함마드 왕세자는 지난 2월 중국을 방문해 35개 프로젝트에 총 280억달러(약 32조원)를 투자하는 협약을 전격 체결했다. 나아가 사우디 정부는 2020년부터 전 교육 과정에 중국어 과목을 채택함으로써 일시적 협력관계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중장기적 협력체제 구축에 나섰다.이웃 쿠웨이트도 100억달러(약 12조원) 규모의 대중국 투자를 약속했다.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의 친중 노선 선회에 이어 지난 7일에는 94세인 마하티르 무함마드 말레이시아 총리가 트럼프 행정부를 국제사회의 신뢰를 상실한 부실 정권으로 맹비난하면서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의 경제적 제국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중국 협력축을 선택하는 흐름은 예삿일이 아니다. 앞으로도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친중 외교전략을 취할 중동·이슬람 국가가 늘어날 전망이다. 이슬람 형제인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인 집단 수용과 박해에는 침묵하면서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 중국에 다가가는 이슬람 정권의 도덕성도 문제지만, 미국의 영향력 특히 트럼프의 국제적 신뢰도가 바닥으로 향하면서 패배로 가는 미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우리의 대중, 대미 전략도 예사롭지 않은 글로벌 흐름을 파악하면서 정교하게 새 판을 짤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