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영의 개러지에서] 엘리엇이 던진 '제안', 실투일까

사진=연합뉴스
'야구장에서 실투(失投)는 역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투수가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던지지 못하면 타자에게 안타나 홈런을 얻어맞기 일쑤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반대한 지 1년 만에 다시 경영에 개입했다. 이번엔 주주제안을 통해 대규모 배당확대와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을 추천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작년과 사뭇 다르다. '우군'이던 미국의 의결권 자문기관이 등 돌리고 현대차의 손을 들어준 데다 주주제안도 '표'를 얻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현대차그룹의 경영구조를 개선하겠다'고 외친 엘리엇은 오는 22일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주주총회에서 '표대결'을 예고했다. 엘리엇은 지난달 27일 주주들에게 서신을 보낸 데 이어 전날(11일)에도 직접 고른 사외이사 후보들의 소개 영상을 공개하고 널리 홍보했다.

반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이사회는 엘리엇의 서신이 공개되기 직전 "엘리엇 측이 제안한 사외이사 후보를 거절한다"고 알렸다. 외국인 사외이사 등 회사 측 후보도 확정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현대차의 주요주주 및 지분율은 현대모비스 등 29.1%, 국민연금 8.7%(2018년 9월 기준), 캐피탈그룹 7.2%(2019년 2월 기준), 엘리엇 3.0%(2018년 8월 기준). 현대모비스의 경우 기아차 등 30.2%, 국민연금 9.5%, 엘리엇 2.6% 등이다.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중요 주주이지만, 제대로 표대결을 벌이려면 일반주주들과의 결집(의결권)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의결권 자문기관인 글래스 루이스가 "현대차의 제안에 찬성해야 한다"라고 주주에게 주문했다.

글래스 루이스는 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반대 입장'을 내며 엘리엇의 편에 섰던 곳이다. ISS와 함께 글로벌 양대 의결권 자문기관이다. 엘리엇의 주주제안에서 어느 지점이 허점일까. 단기적인 제안에 급급해 중장기 투자자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게 여의도 증권가(街)의 지적이다.

엘리엇은 현대차에 5조8000억원(우선주 포함, 시가총액 대비 19%), 현대모비스에 2조5000억원(시총 대비 12%)씩 '특별배당'을 요구했다. 이는 지난해 현대차 영업이익(2조4222억원)의 2.4배, 순이익(1조6450억원)의 3.5배에 달한다.

이 같은 거액의 배당 요구는 엘리엇을 포함한 특정 주주에게만 유리한 제안이다. 기말배당금으로 책정해 달라는 이야기인데 작년 말 주주명부 기준으로 배당이 확정된 주주들만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삼성증권 임은영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기업분석가)는 "엘리엇의 제안은 이미 지난해 말로 확정된 주주만 수혜를 누릴 수 있는 데다 단기적인 특별배당이란 측면에서 지속성이 높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장기 투자자들의 경우엔 엘리엇보다 현대모비스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며 "엘리엇보다 모비스의 제안(3년간 배당확대·자사주 매입)이 새로운 투자자를 유인하고 지속 가능성이 높은 주주정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엘리엇은 주주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통주 1주당 2만6399원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반영한 2018년 현대모비스 재무제표가 승인될 경우 주주들은 '일회성'으로 현대모비스 현재 주가의 12%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임 애널리스트는 "단기 투자자 입장에선 엘리엇의 투자안이 매력적이겠지만, 중장기투자자의 경우 현대모비스의 3년 분할안이 더욱 유리하다"며 "엘리엇의 1년짜리 배당안을 수용하면 향후 인수·합병(M&A)여력 부족 및 일시적 배당 이후 기업가치의 하락이 주가흐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내다봤다.

엘리엇이 내세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을 앉혀달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도 엘리엇과 외국인 주주 간 공조를 방어하려고 창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사외이사 등을 후보로 올렸다.

현대모비스는 이사회와 별도로 낸 자료에서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선임과 관련한 엘리엇의 주주제안은 일반적인 측면에서 이사회의 다양성을 보강할 여지는 있지만, 회사 측에서 사외이사로 추천한 후보들이 미래차 부문의 경영 및 기술 분야와 투자·재무 분야에서 단연 글로벌 최고 전문가들이란 판단에서 반대의견을 냈다"라고 피력했다.

엘리엇은 급기야 영상물까지 제작했다. '액설러레이트 현대' 사이트에 올린 영상에서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우리가 제출한 주주제안 사항에 찬성표를 행사해달라"며 사외이사 후보들을 소개했다.

엘리엇은 현대차의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으로 존 Y. 리우 베이징사범대 교육기금이사회 구성원 및 투자위원회 의장, 로버트 랜달 맥이언 발라드파워시스템 회장, 마거릿 S 빌슨 CAE 이사 등 3명을 제안했다. 현대모비스에는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 후보로 로버트 앨런 크루즈 카르마오토모티브 최고기술경영자(CTO), 루돌프 윌리엄 폰 마이스터 전 ZF 아시아퍼시픽 회장 등을 후보 명단에 올렸다.

리우 후보의 경우 영상을 통해 "6년 이상 SK텔레콤의 중국사업을 이끌었고, 정보통신(ICT) 분야에서의 전문성으로 이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고, 크루즈 후보는 "40년 이상 자동차 개발에 종사했는데 현대모비스 고객들이 어떠한 기술, 성능, 품질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벨로즈시티 홈페이지 EV 디자인 화면 캡처
그렇지만 현대차그룹의 사외이사 후보들도 쟁쟁한 인물이다. 현대모비스의 경우 미래차 기술전략 분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문 엔지니어 경력을 갖춘 경영자 칼 토마스 노이먼(Karl-Thomas Neumann) 박사를 영입하기로 했다.

독일 태생인 노이먼 박사는 미래차 시장을 아우르는 사업제품 기획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모토롤라 차량용반도체 엔지니어로 출발해 글로벌 자동차 부품기업 콘티넨탈에서 사업전략담당과 CEO로 활동했고, 독일 폭스바겐그룹 중국 담당 총괄과 독일 오펠 CEO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혁신적 전기차 컨셉의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는 스타트업인 이벨로즈시티(Evelozcity)에서 영업마케팅과 모빌리티 분야를 총괄하고 있는데 자동차 소재, 부품, 완성차 업체에 이어 스타트업 경험을 바탕으로 'R&D·사업개발·경영'에 이르는 방대한 노하우를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유진투자증권 이재일 애널리스트는 "기존 현대모비스의 이사회 구성은 한국 국적의 학술, 법률, 정부 기관 출신으로 구성돼 산업 전문가와 글로벌 경험을 가진 사외 이사의 부재가 이사회 구성의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었다"면서 "그러나 이번 신규 사외 이사 선임안으로 이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판단했다.

메리츠종금증권 김준성 애널리스트도 "이사회 구성 등 확실하게 보여준 현대차그룹의 태도 변화가 투자심리에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나아가 기업가치의 방향성이 주주가치를 인정하고 주주 동의를 얻기 위한 공정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시기"라고 덧붙였다. 엘리엇이 던진 주주제안이 '실투'인지 아닌지 현대차그룹의 타석에서 판정날 것이다.
이벨로즈시티 홈페이지 EV 디자인 화면 캡처.
정현영 한경닷컴 기자 j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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