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에 보장된 '피고인 방어권'을 '남용'이라고 주장하는 검찰
입력
수정
지면A29
현장에서“‘피고인 방어권 남용’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나요? 검찰이 이런 표현을 하다니 법률가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피고인 방어권 남용' 표현은
법조계선 듣도보도 못한 말
고윤상 지식사회부 기자
지난 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 검찰이 피고인 방어권 남용을 주장하자 고위 검찰 출신 변호사가 내놓은 반응이다. 검찰의 기소에 맞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우리 법률 체계의 기본을 망각한 처사라는 이유에서다. 또 다른 판사 출신인 변호사도 ‘피고인 방어권 남용’은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라며 혀를 찼다.검찰은 이날 공판에서 “임 전 차장이 변호인들을 사임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일부러 재판을 늦추는 전략을 펴고 있다”며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엄중히 경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임 전 차장이) 재판의 장기화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방어권 남용”이라고 말했다.
‘피고인 방어권 남용’이라는 표현은 법조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변호인단 교체나 진술 증거 부동의는 피고인의 당연한 권리로 통한다. 오히려 통상 ‘남용’이란 표현과 묶이는 건 수사권이다. 수사권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수사하는 일방적 상황에서 행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이 법원에 공소장을 제출하는 순간 상황은 바뀐다. 피의자는 피고인이 되고 검찰과 피고인의 위치는 동등해진다. 수사기관이 권력을 남용하더라도 이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헌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이다.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형사소송법상의 대(大)원칙도 같은 취지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우리 헌법은 피고인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지켜주자고 한다”며 “피고인 방어권에 남용이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검찰은 그동안 수사권을 남용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법정에서 다툼을 벌이는 상대방에게도 남용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 피고의 법률적 지위를 망각한 이런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여전히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검찰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