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거대한 생명의 순환…"인간은 不死 누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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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미국 보스턴미술관엔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의 작품이 있다. 오른쪽엔 갓난아기가 누워 있고 가운데엔 한 젊은이가 두 팔을 높이 들어 과일을 따고 있다. 왼쪽 끝엔 피부가 검고 백발이 된 노인이 앉아 있다. 그림 왼쪽 귀퉁이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문구를 새겼다.
1967년 시각의 생리·화학적 작용에 대한 연구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의 생화학자 고(故) 조지 월드가 쓴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는 이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과학이야말로 고갱의 그림에 대한 확실한 길을 제공한다고 역설한다. 물질에서 시작한 우주의 기원부터 생명·인간·죽음의 기원 등 의식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인류의 ‘거대담론’을 소소한 사실과 사례로 이어간다.저자는 같은 조건일 경우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생명이 출연하며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탄생에 이른 것 자체로 웅장하고 존귀한 것이라고 말한다.
1970년 저자가 여섯 차례 한 강연과 인터뷰를 엮어 펴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4장 ‘죽음의 기원’이다. 저자는 “인간은 이미 불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개별 생명체 차원에서는 소멸하지만 생식세포를 통해 종 차원에서는 이미 생명을 연장하며 불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거대한 생명의 순환을 통해 죽음이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며 인류에 낙관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가 강연을 한 지 50년이 지나가지만 기후 변화부터 전쟁 위험, 기술 오남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여전히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 사이에서 과거의 저자는 현재의 우리에게 “생명을 택하고 인간으로서 가진 우리 능력에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지구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인식하고 인간성을 항상 영예롭게 여기라는 그의 따뜻한 시각이 책 곳곳에서 묻어난다. (조지 월드 지음, 전병근 옮김, 모던 아카이브, 184쪽, 1만3000원)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