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위험의 외주화 금지'라는 환상
입력
수정
지면A34
정규직화·외주화 금지는 심리적 안도감뿐안전사고로 인한 억울한 희생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제도를 개선해 선진국형 안전 환경을 만들 기회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위험의 외주화 금지’는 안전이 보장되는 외주화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고임금 전문직화로 개선해야 한다.
안전시설은 분리 발주하고 시공은 전문화
안전수칙 준수도 강화해 사고위험 줄여야
정석현 < 수산중공업 회장 >
얼마 전 태안화력의 고(故) 김용균 씨 사고가 알려지면서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그 후로도 사고가 계속되고 있어 안타깝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당정은 한국전력의 발전 자회사들과 개선책을 협의하고 있다. 운영 중인 화력발전소에서 연료·환경 설비의 운전·정비 업무에 종사하는 민간업체 정규직 종사자들을 비정규직으로 정의하고, 해당 역무는 ‘위험의 외주화’이므로 공기업성 민간업체인 한전산업개발(자유총연맹이 최대주주)을 다시 공기업화해 민간업체 종사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게 했다. 또한 경쟁 입찰로 발주하던 역무를 수의계약으로 발주해 독점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조치는 화력발전소 연료·환경설비 운전 역무 종사자에 국한해 단기간 심리적 안도감은 줄 수 있겠지만 전 산업계의 안전환경 확보책으로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개선책이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효율 저하 등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작업장의 안전은 고용형태나 외주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안전한 작업환경은 △책임소재가 명확한 제도 확립 △과학적이고 검증된 안전시설 확보 △교육훈련을 통한 안전수칙 준수 등의 문화가 정착해야 달성할 수 있다. 특히 고위험 작업은 유자격 전문직이 종사하도록 해 고임금 직종으로 개선하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다.
작업장의 안전한 환경을 위해서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안전시설이 가장 중요하다. 우선, 안전시설 전문시공업 면허를 신설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은 본 공사와 별도로 분리 발주해야 한다. 추락, 낙하 등 고위험 작업장의 비계틀, 안전봉, 안전망, 조명 등의 안전시설은 발주자가 직접 안전시설 전문 시공업체에 시공량만큼 정산하는 개산공사제(총액제로 하면 공사 내용이 빈약해질 수 있음)로 본 작업과 분리해 발주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안전사고가 제일 적은 쉘석유는 오래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공사를 발주함으로써 안전한 환경의 모범기업이 됐다.둘째, 시공자(용역수행업체)는 작업자를 직접 고용하고 교육훈련, 작업지시 및 감독의 책임이 있으므로 고위험 작업장 근무조는 반드시 복수로 편성해야 한다. 조장은 유경험 자격자로서 위험요인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까지도 살피도록 해야 한다. 고층빌딩 외벽 유리창 청소작업은 대표적인 고위험 작업인데도 안전사고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은 설비의 안전점검을 철저히 하고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이 안전수칙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셋째, 작업자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주의, 경고, 징계는 물론 해고까지 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 안전벨트 미착용 등 안전수칙 미준수로 인한 중대재해 빈도가 아주 높다.
넷째, 산재보험료를 인상해서라도 중대사고로 사망에 이르는 사고가 났을 경우 유족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산재보험 보상금액을 올려야 한다. 산재보험의 보상이 적기 때문에 기업들은 근로자재해보험, 상해보험 등의 추가적인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사망사고는 애석한 일이나 합의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야기되고, 작업장은 작업이 중단돼 손실이 누적된다. 근로복지공단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보상금액 산출 표준모델을 제정하고 운용해서 유족들이 억울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사실 산업현장보다 위험 요소가 훨씬 많은 곳이 도로다. 그런데 교통법규와 안전수칙을 지키려는 국민적 습관이 사고를 예방하고 있고, 중대사고가 나더라도 보험회사가 피해자 측과 보상 협의를 하게 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다투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산업재해도 형사처벌은 별도로 하더라도 민사적인 보상은 당사자 간에 합의하도록 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 이런 제도 개선이 정착되려면 정부는 모든 참여자가 각자의 의무를 지키지 않을 수 없도록 제도를 명확히 제정해야 한다. 사고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현장을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