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에 좌우 분열…이승만 "찬탁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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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반탁·반공운동
(45) 대한민국의 탄생
1946년 3월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서울에서 열렸다. 북한의 소련군 대표는 임시정부를 내각책임제로 하며, 중도파 여운형과 김규식을 내각 총리와 부총리로 삼고, 내무·국방·교육을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재정·교통·상공·체신·보건은 남한의 미국군 대표가 추천하는 인사로 채운다는 복안을 마련했다. 소련군 대표는 그들의 복안을 미소공위의 테이블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미소공위가 협의할 남한 정당·단체의 자격을 문제 삼아 공위 자체를 좌절시키는 전략을 택했다.모스크바협정이 알려지자 남한의 정치세력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과 그에 찬성하는 좌익으로 갈라졌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끈 반탁 세력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이끈 찬탁 세력을 능가했다. 소련군 대표가 소련이 동유럽에서 능숙하게 구사한 통일전선을 포기하고 계급전선으로 돌아선 것은 남한의 우익을 임시정부에 참여시켰다가는 북한에서 진행 중인 그들의 혁명마저 위태롭겠다는 정세 판단에서였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공산주의의 통일전선에 현혹하거나 포섭될 정도로 약체이지 않았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좌우합작을 통한 신탁통치는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그의 반탁운동은 곧 반공(反共)운동이었다.
이승만의 단정 노선
미소공위가 지지부진한 사이 1946년 4월 이승만은 남한 전역을 자동차로 순방하는 여행에 나섰다. 천안, 대전, 김천, 대구, 경주, 부산, 마산, 진주, 순천, 영암, 목포, 광주로 이어진 이승만의 남순(南巡)은 도처에서 수많은 백의(白衣)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 인파는 신문이 그 수를 보도한 도시에서만 총 100만 명에 달했다. 잠시 지나친 소도시까지 합하면 200만 명을 넘었을 것이다. 왕족 출신이라는 그의 원 신분과 독립협회, 한성감옥, 최초의 미국 박사, 미국 대통령과의 연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어진 그의 화려한 이력은 불안한 현실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대중에게 구원의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확인한 그를 향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는 이후 그가 결행한 모든 정치적 선택의 굳건한 토대를 이뤘다.
광주에서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파탄을 맞는 것을 보고 남순을 재개했다. 정읍, 전주, 이리, 군산, 공주, 청주, 장호원의 코스였다. 6월 3일 그는 정읍에서 남한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사실상 임시정부로 행세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어떤 민족적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토지개혁을 강행하고 있는 그 임시정부였다.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 지주, 자본가, 지식인, 종교인을 추방하고 생산시설을 국유화하고 있는 그 위원회였다. 남한도 서둘러 그와 비슷한 조직을 결성해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상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경쟁자들은 그의 단정(單政) 노선이 민족 분단을 초래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미군정도 그의 발언을 비난했다. 위선적이게도 그들은 분단을 향해 먼저 달린 쪽이 북한임에 대해선 침묵했다.국민적 선택
당시 미 국무부에는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소련의 간첩들이 침투해 한국 정책을 좌우했다. 미 국무부는 망명객 출신의 늙은 정치인이 미국을 방해한다면서 미군정에 이승만의 제거를 지시했다. 이승만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들었다. 그렇지만 대중의 그를 향한 지지는 쉽게 철회되지 않았다. 1946년 7월 미군정은 8576명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어느 정치단체를 지지하는지’ 여론조사를 했다. 우익으로서 민주의원(24%), 임시정부(14%), 조선민족통일총본부(10%)에 대한 지지는 합해서 48%였다. 좌익을 대표하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17%)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2%)에 대한 지지는 합해서 19%였다. 나머지 33%는 어느 단체도 지지하지 않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은 몇 사람의 정치가가 억지로 세운 나라가 아니다. 널리 잘못 알려진 그 같은 속설은 하루빨리 불식돼야 한다. 남한 대중의 다수가 그 정치적 선택에 동참했다. 남한 주민의 적어도 30~40%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이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가치임에 동의하는 근대화된 인간들이었다. 고난에 가득 찬 20세기 전반의 역사가 그런 인간군을 창출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재앙이었다. 그들이 ‘자유의 길’을 선택할 때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40%가 뒤를 따랐다. 나머지 20%는 그에 저항한 좌익이었다.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는 소수의 잘 조직된 좌익이 다수의 산만한 우익을 억눌러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했다. 거기와 달리 여기의 우익은 그의 조국을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소생시키기 위해 50년을 투쟁한 한 혁명가가 있어서 공산화의 위험에 잘 대처했다는 행운을 누렸다.유엔의 한국 결의
1947년에 들어 동서냉전의 막이 올랐다. 동년 5월 두 번째 미소공위가 열렸지만 소련은 이전과 동일한 전략으로 좌절시켰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 한국 독립에 큰 열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미국은 카이로선언의 약속을 지킨 다음 서둘러 한국에서 철수할 요량이었다. 냉전 개시에 따라 미국이 투자할 지역의 우선순위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한반도의 군사전략 가치가 크지 않았다. 미 정보국이 전망하기로는 내부 분열과 빈곤으로 찌든 남한은 아무래도 소련권에 흡수될 운명이었다. 한국의 독립과 통일 문제는 더욱 위험하고 유동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유엔은 남북한에 자유선거를 시행해 ‘통일적 중앙정부’를 구성할 임무를 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했다. 소련은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절했다. 여태껏 보조를 맞춰온 남한의 우익도 크게 갈라졌다. 유엔이 위원단에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라고 결정한 데에는 인도 출신 위원장 메논의 연설이 주효했다. 메논은 남한이 몇 개의 정파로 분열해 있지만 인도인에게 네루와 같은, 신비한 지도력을 지닌 이승만이 자유민주이념에 입각해 가장 큰 영향력의 정파를 이끌고 있어서, 그의 주장에 따라 남한만이라도 독립시키는 것이 국제사회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이후 좌익세력의 폭력적 저항을 진압하면서 총선거가 시행됐다. 이후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선출되고, 행정부와 사법부가 조직되는 정치 과정은 잘 알려졌기에 소개를 생략한다.자유인의 공화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성립을 만방에 선포하는 축전이 열렸다. 그날 밤 미군정은 남한의 통치권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했다. 이로써 1910년 대한제국의 패망과 더불어 망국노가 된 한국인이 다시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그 지위를 회복했다. 당일의 축전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 복구된 동양의 한 고대국가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수호하는 민주정체(民主政體)임을 선포했다. 우리가 적과 부단히 싸워온 것은 그들의 전제정치가 우리의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는 그 세계사적 기원이 서양 민주국에 있다. 미국의 독립정신과 같은 것이다. 그 이념에 기초해 3·1운동을 일으켜 독립을 선포했으나 당시는 세계정세에 구애돼 좌절했다. 이후 30여 년간 혈전고투를 벌인 끝에 이제 다시 그 국가를 재건하노니 이는 유엔이 그 성립을 결의한 ‘통일적 중앙정부’에 다름 아니다.대한민국 탄생의 세계사적 의의와 일국사적 정통성을 이같이 천명한 정치철학의 명연설은 이후 어느 대통령에 의해서도 울려진 바가 없다. 4개월 뒤 유엔은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승인했다. 그에 기초해 1949년 1월 미국이 맨 먼저 대한민국을 승인했으며, 영국 등 자유우방이 그 뒤를 따랐다. 1950년 6월 소련의 지시와 지휘로 북한 공산세력이 남한을 침공하자 자유우방 16개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해 이 나라를 방위했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이 나라는 세계사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끈 자유의 정신이, 그로 뭉친 자유인의 국제연합이 건설하고 수호한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