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싸움으로 변질된 국민연금 수탁자委…우연히 참석 2명이 '조양호 반대' 캐스팅보트

현장에서

유창재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지난 26일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하기로 결정한 과정은 27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은 원래 수탁자책임위 산하에 9명으로 구성된 주주권행사 분과위원회가 결정한다. 하지만 대한항공 주식 1주를 보유한 이상훈 변호사(서울시 복지재단센터장)가 이해상충을 이유로 회의에서 배제되면서 표는 반대 4, 기권 4로 팽팽히 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회의를 책임투자 분과위원회를 포함한 수탁자책임위 전체 회의로 전환할 수밖에 없던 배경이다. 책임투자 분과위는 투자 전 단계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인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 소위원회다.
26일 오후 5시 반. 보건복지부는 영문도 모르고 있던 책임투자 분과위 위원 5명에게 황급히 전화를 돌려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마침 시간이 맞은 2명의 위원이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추천을 받은 위원들이었다. 한 시간여의 간단한 설명과 토론을 거쳐 표결에 들어갔다. 이들 2명의 위원은 예상대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날 저녁 이들 두 위원 대신 재계 추천 위원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국민연금은 27일 대한항공 주총에서 조 회장 재선임 안건에 ‘반대’ 대신 ‘기권’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조 회장은 재선임에 성공했을 공산이 크다. 국내 최대 국적 항공사 대표이사의 운명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투자업계는 수탁자책임위의 이 같은 주먹구구식 운영 방식보다 더 큰 문제는 위원회가 진영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수탁자책임위는 국민연금의 다른 위원회들처럼 정부,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 연구기관 등이 추천한 인사로 구성된다. 이날 회의에서 위원들의 찬반은 추천한 단체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근로자단체 추천을 받은 위원들은 반대표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대한상공회의소 등 사용자단체 추천을 받은 위원들은 기권표(주총 불참)를 던졌다. 지역가입자단체 중에서도 참여연대 추천 위원은 반대, 공인회계사회 추천 위원은 기권이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 기업에 대한 의결권 결정은 전문 투자행위인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는 비전문가가 모여 추천 단체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찬반을 결정하고 있다”고 했다.

수탁자책임위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책임원칙)를 도입하면서 주주권 행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구성한 위원회다. 하지만 전문성보다 대표성에 초점을 맞춰 위원회를 구성하다 보니 민간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가 진영 싸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독립성조차 담보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국내 대표 상장사들의 주총이 정치판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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