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럴듯한 속임수와 조작…속는 줄 모르고 당하는 필록테테스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46) 조작(造作)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1766~1837)의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가 필록테테스로부터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을 빼앗다’(유화, 1799~1800년).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소장.
‘시간(時間)’만이 정의롭다. 시간은 우주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만물을 자신의 원칙에 따라 변화시킨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시간이 만물을 대하는 태도다. 만물은 시간의 원칙에 따라 태어난 후에 저절로 흠이 생겨 병든 후 자취를 감춘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이 흐름에 지혜롭게 순응한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온몸에 간직하고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들은 순간에 충실하다.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잠시라도 그것을 왜곡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 시도를 ‘인위(人爲)’라고 부른다. 양적인 시간을 가로막아 잠시라도 질적인 시간으로 만들려는 창의적인 노력이 인위다. 인위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겠다는 인간의 노력이다.

인과(因果)인위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위다. 그러나 인위가 공평하지 못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불행이 찾아온다. 그런 인위가 ‘조작(造作)’이다. 악의를 품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속인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속이는 행위는 반(反)인륜적일 뿐만 아니라 반(反)우주적이다. 산, 바다, 강, 인간, 도시, 문명과 같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인과(因果)’라는 원칙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세상의 일에는 원인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 원인이 그에 합당한 결과로 정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물은 산소와 수소로 구성됐으며 무색무취하다. 만일 물방울이 수면 위에 떨어지면, 그 수면에 원형 파동을 일으키고, 물방울은 반동으로 공중으로 잠시 부양했다가 다시 물 위에 떨어진다. 물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이 완벽하고 신비로운 작용과 반작용의 현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조작은 인간이 창의적인 노력으로 구축한 문명과 문화에 대한 반칙이다. 조작을 통해 사적인 이윤을 얻으려는 사람은 인과의 원칙을 무시하고 파괴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가 감언이설(甘言利說)이다. 그는 상대방의 처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는 말로 위장한다. 심지어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함락하기 위해 반드시 필록테테스의 화살과 활이 필요하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와 그 일당은 필록테테스를 속여 그의 활과 화살을 탈취하기 위해 렘노스 섬으로 왔다. 그들은 진의를 감추고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속임수

필록테테스는 10년 동안 외딴섬에서 비참하게 살아 왔다. 그가 필요한 것은 대화 상대였다. 인간만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에게 말을 건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이미 호감을 가졌다. 특히 네오프톨레모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넬라오스, 아가멤논, 그리고 오디세우스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였다. 이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친구가 됐다. 갑자기 찾아와 이런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는 별도의 의도가 있다. 네오프톨레모스의 거짓말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오히려 필록테테스가 자신을 그 섬에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그는 간청한다. “그대가 나를 구해주시고, 그대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501행)

네오프톨레모스는 그와 함께 배를 타고 출항할 것이다. 필록테테스는 감격해 네오프톨레모스와 선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오,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런 날이여! 가장 상냥한 친구와 너희 선량한 선원들이여! 당신들이 나에게 진정한 친구라는 사실을 내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530~532행)그는 이들을 자신이 거주하던 동굴 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필록테테스는 이들에게 불행이 그를 얼마나 호되게 가르쳤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막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두 낯선 자가 찾아와 말을 건다. 이들은 네오프톨레모스와 마찬가지로 오디세우스가 보낸 정탐꾼이다. 정탐꾼은 선주로 변장해 그들에게 접근한다.

정탐꾼은 네오프톨레모스를 모른 척하며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을 건다. “오, 아킬레우스의 아들이여. 나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당신의 배를 지키던 내 동행인에게 어디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연히 같은 해안에 정박해 뜻밖에 내가 당신과 마주치게 됐습니다.”(542~546행) 정탐꾼은 네오프톨레모스처럼 단순히 말로만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완전히 조작한다. 이 정탐꾼은 오디세우스 대신 필록테테스를 속이기 시작한다. 부자 선주로 변장한 그는 오디세우스가 필록테테스를 트로이로 강제로 견인하기 위해 오고 있다고 거짓말한다.

소포클레스는 《필록테테스》의 주제인 ‘조작’을 선주로 변장한 정탐꾼을 통해 다시 부각시킨다. 그리스 단어 ‘델로스(delos)’는 눈으로 보이는 증거를 왜곡해 상대방을 현혹하고 속이는 조작이다. 선주의 정체는 네오프톨레모스가 타고 온 배의 선원이다. 그리스 서사시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남들을 의도적으로 속이는 사기꾼으로 등장한다. 사기꾼을 그리스어로 ‘델리오스(delios)’라고 부른다. 오디세우스는 대표적인 사기꾼이다. 트로이를 정탐하기 위해 스스로 온몸에 피부병이 걸린 걸인으로 변장한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함락하기 위해 ‘트로이 목마’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 버리고 간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왔고, 그 안에서 나온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다.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면서 걸인으로 변장해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 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아버지 라이테스와 조우한다.헬레노스의 예언

정탐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렘노스 섬으로 돌아와 오래전에 유기한 필록테테스를 데리러 오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자 점쟁이인 헬레노스가 혼자 밤에 들판으로 나왔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그를 생포해 그리스 진영으로 데려와 트로이 함락의 비밀을 캐낸다. 헬레노스는 그들에게 트로이 성채를 함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적의 활과 화살을 지닌 필록테테스를 다시 트로이로 송환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이 말을 들은 필록테테스는 울며 외친다. “아아, 슬프도다. 그 흉악무도한 자(오디세우스)가 나를 설득해 아카이오이족(그리스인들)에게 데리고 가겠다고 맹세했다니! 내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저승에서 햇빛으로 올라가도록 나를 설득하는 편이 차라리 빠를 것이오.” 필록테테스는 그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 자신을 그들에게 압송하는 일보다 쉬울 것이라고 말한다.

감언이설(甘言利說)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조작은 진짜와 거의 구별할 수 없다. 특히 상대방의 비위에 맞게 그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그럴듯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운다. 속는 사람은 자신이 속는 줄 모른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신이 희생제물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절름발이로 만든 독사의 말을 듣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오디세우스가 도착하기 전에 섬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필록테테스는 자발적으로 섬을 떠나려고 한다.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의 조작은 완벽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의 간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넌지시 말한다. “먼저 동굴에서 그대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지고 나오십시오.”(645~646행) 필록테테스는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약초이고 다른 하나는 화살이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활에 어울리는 화살이다.

네오프톨레모스는 드디어 활을 두 눈으로 본다. 그리스인들의 염원인 트로이 성벽을 무너뜨릴 무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가 그 활을 가까이서 살펴보고 만져봐도 됩니까? 내가 그 활을 신처럼 경배해도 될까요?”(656~657행) 필록테테스가 자신의 생명과 같은 활을 그에게 넘겨주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젊은이여! 당신의 말은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에게만 허용하겠습니다.(…)그대는 안심하고 활을 가지고 가서 만져 보고는 그것을 나에게 돌려주시오.”(662~667행) 속임수와 조작은 항상 그럴듯하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이해해주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정탐꾼의 조작과 감언이설에 속는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