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흑인 주인공 맹활약…깨지는 '남성·백인' 신화

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영화 '캡틴 마블'·'어스'
잇따라 박스오피스 1위
문화 절대주의에 변화 바람
여성 히어로를 소재로 한 영화 ‘캡틴 마블’. /마블 제공
“난 늘 통제당해 왔지. 그걸 무너뜨리고 자유로워지면 어떻게 될까?”

영화 ‘캡틴 마블’의 주인공 캐럴은 자신의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 ‘조절’하는 법을 훈련받는다. 욘 로그는 이를 선의로 포장하며 캐럴이 스스로를 억누르도록 유도한다. 의지대로 힘을 발산하는 것은 곧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라 세뇌했다. 그러나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안 순간, 캐럴은 어느 히어로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자유롭게 온 우주를 누비며 마음껏 힘을 발산한다.지난 6일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평점 테러’에 시달렸다. 남성 아닌 여성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기존 여성 히어로의 모습과도 다르다. ‘원더우먼’처럼 섹시한 의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블랙 위도우’처럼 남성 히어로를 돕는 역할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훈련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도 쉽게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평점 테러는 그러나 이런 여성 히어로 앞에 무기력했다. 작품은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누적 관객 수 534만 명을 기록했다.

오랜 시간 문화예술계를 지배해 온 ‘신화의 공식’이 깨지고 있는 걸까. 신화의 주역은 늘 남성, 특히 백인의 차지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시작된 이 서구 문명의 공식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퍼져 있다. 히어로물에서 늘 남성, 백인이 주인공이었던 게 대표적이다. 여성, 흑인을 다룬 작품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시장의 중심에 서진 못했다. ‘다양성 영화’라는 틀에 갇혔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이들이 시장의 중심에 등장, 객체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 변신하고 있다.

지난 27일 개봉한 ‘어스’도 ‘캡틴 마블’에 이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인종차별을 다양한 은유와 시각으로 풀어내 호평받고 있다. 공포 영화지만 수많은 화제를 낳으며 연일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관객들은 이 작은 변화 속에서 새로움을 느낀다. 지난 1월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 2’에 나온 공주들이 준 충격도 그랬다. 작품엔 백설공주, ‘겨울왕국’의 엘사 등 기존 디즈니의 공주 캐릭터들이 카메오처럼 등장했다. 이들은 처음엔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러나 다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런 변화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문화절대주의가 해체되고 상대주의가 확산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도래한 것 같다. 성별, 인종 등을 기준 삼아 한쪽의 문화를 억누르는 행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특히 ‘권위’를 앞세워 이를 관철시키던 곳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17년 미국 ‘그래미 시상식’에서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다. 당시 그래미는 흑인인 비욘세가 아니라 아델에게 ‘올해의 앨범상’을 줘 비판을 받았다. 아델은 비욘세를 위해 자신의 트로피를 쪼개며 이 결정에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2월 그래미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흑인 여성 가수 얼리샤 키스를 사회자로, 흑인 래퍼 켄드릭 라마를 최다 부문 후보로 내세웠다. 같은 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그린북’이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캡틴 마블’을 보다 문득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1986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이다. 흑인 여성 셀리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오랜 기간 시달린다. 그러다 자아를 인지하고 떠난다. 남편은 “넌 못생기고 멍청하고 흑인이야.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야”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셀리는 웃으며 말한다. “난 못생기고 멍청하고 흑인이야. 하지만 난 자유야.” 30여 년을 뛰어넘어 셀리와 캐럴의 대사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이 ‘자유’가 실현되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이제서야 신화의 공식을 깨부수기 시작한 그들의 자유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길 바란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