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여우와 포도

전희권 < 에스퓨얼셀 대표 sales@s-fuelcell.com >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이솝우화 가운데 ‘여우와 포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맛있게 잘 익은 포도를 보고는 먹고 싶어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닿지 않았다. 여러 차례 있는 힘을 다해 뛰어봤지만 번번이 실패한 여우는 결국 포도를 따먹지 못했다. 돌아가면서 여우가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히 너무 셔서 맛이 없을 거야.” 그때는 이런 여우의 비겁함과 자기합리화를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여우는 그 포도가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노력해도 따먹을 수 없게 되자 ‘포도의 가치’를 바꿨다. 포도를 따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나 우화 속 여우를 적은 노력으로 큰 것을 바라는 욕심꾸러기이자 비겁함의 표상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로 유명한 ‘콩코드’는 천문학적인 개발비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개발 초기엔 멋진 디자인과 빠른 속도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속도에만 몰두한 나머지 탑승인원 제한과 소음 문제는 간과됐다. 1970년 오일 파동으로 더 이상 사업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이때도 영국과 프랑스는 콩코드를 ‘신 포도’라 외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인 비용과 두 나라의 자존심 때문에 콩코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여객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건 2000년 폭발 사고가 나면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목표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오르지 못할 나무 위에 매달린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수없이 많이 봤다. 그중 일부는 운 좋게 적절한 노력으로 닿을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어떻게 해도 나에겐 닿지 않는 ‘신 포도’였다. 사회생활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는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승복하는 수용적 자세의 용기가 오히려 필요한 때가 있다.

세상의 어떤 목표도 땅 위에 저절로 떨어져 손쉽게 주울 수 있는 열매와 같지 않다. 우리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늘 최선을 다해도 닿을까 말까 한 높다란 나무 위에 걸려 있다. 물론 이상론자들은 ‘나무에 오르기 전 우리의 체력과 그날의 컨디션, 나무에 오를 때의 난이도와 열려 있는 열매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오를지 결정해야 한다’는 지극히 책상물림적 사고방식의 원론적인 얘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난이도와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노력할 가치가 없는 일 대신 다른 가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이솝우화의 여우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