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노무현의 저출산 위기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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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푼다고 효과 있겠나?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과 겹친 3년6개월 남짓했던 경제부장 근무 시절, 청와대 오찬에 세 차례 초대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년에 한 번꼴로 언론사 경제부장들과 점심을 먹으며 정책현안을 토론했다. 사전 질문 취합 없이 즉석토론을 즐겼다. 그중 한번은 저(低)출산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출산대책요? 정부가 돈을 푼다고 효과가 제대로 나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 참 살 만하다. 이 좋은 세상 혼자만 살다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도 출산율이 높아질 겁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며 정치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노 전 대통령다운 통찰(洞察)이었다.
살 만한 세상 돼야지"
150조원 쏟아붓고도
출산율 세계 꼴찌로 추락
개인 의욕과 사회 활력 꺾는
'정책 지옥' 없어야
이학영 논설실장
세계 최저 수준을 치닫는 출산율 지표는 이 나라가 그의 소망과 반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2008년 1.19명이었던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의 수)이 지난해 0.98명으로 내려앉았다. ‘인구 유지의 마지노선’으로 꼽히는 2.1명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노 전 대통령 집권기인 2006년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5년 단위로 시작된 이래 재정 투입액이 150조원을 넘어섰지만 출산율 하락세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출산율 하락이 ‘세계신기록’을 경신해나가는 한편으로 ‘출산지원’ 재정 투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돈을 푼다고 효과를 내겠느냐”던 노 전 대통령의 탄식이 헛헛하게 귓가를 맴돈다.통계청이 엊그제 내놓은 ‘장래인구 특별추계’에는 “외국인 체류자를 포함한 총인구가 이르면 내년부터 줄어들고, 사망자보다 출생아가 더 적어지는 인구 자연 감소는 올해부터 시작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이 머지않아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국가가 될 것이라는 경보(警報)도 울렸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될 때 일어나는 충격을 전문가들은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한꺼번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겹쳐 더할 수 없이 나쁜 상황)’에 비유한다. 경제활동인구 부족에 따른 국가재정 위축 속 노인복지 비용 증가 등 온갖 악재가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재임 시절 “북한 핵보다 더 무서운 게 저출산”이라고 한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정말로 끔찍한 재앙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지금 당장은 괜찮으니까…”라며 딴청을 부릴 수 있겠는가. 정부와 정치권 일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선거를 앞둘 때마다 보여주기식 현금살포 정책을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해 내놓고는 “우린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우긴다. 가구소득을 따지지 않고 영유아 가정에 일괄적으로 돈을 뿌려대는 식이다. 문제 인식의 진지함이나 대책의 절박함을 찾아볼 수 없다.
돈만 퍼붓는 인구정책은 ‘백약이 무효’임이 확연해졌으니, 정부는 완전히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야 할 숙제를 안았다. “사람들이 세상 참 살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출산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던 노 전 대통령의 어록(語錄)이 그래서 더욱 되새겨진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반대다. 청년단체 대표가 대통령 앞에서 “정부가 청년의 삶을 고민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며 눈물을 터뜨리고, 국민 대다수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나빠지고 생활이 힘들어지고 있다”며 가슴을 치는 게 현실이다.정책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실행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현장과 전문가들 목소리를 경청해서 방향을 다시 잡아야 마땅하다. “노 전 대통령은 아침엔 좌파였다가 낮엔 우파로 변해 있기 일쑤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고위공무원을 지낸 사람들의 회고다. 운동권 출신 참모들과 저녁을 먹은 뒤엔 잔뜩 ‘좌클릭’한 상태에서 아침을 맞지만, 일과시간 동안 경제 현실을 챙기는 관료엘리트들의 보고를 받고 나서는 ‘우클릭’돼 있더라는 우스갯소리다. 환경단체의 반대를 뚫고 경기 파주에 세운 대규모 LCD 단지는 그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뿌리치지 않았고, 듣고 나서 “얘기가 된다” 싶으면 유연하게 수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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