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시뻘건 불길에 집·공장 잿더미…"50년 만에 이런 산불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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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속초 등 강원 산불지역 가보니…5일 오후 2시 강원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7번 국도. 전날 저녁 7시께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해 이곳을 덮친 산불의 흔적은 마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화재 진압 이후 마을 산자락은 검은 재가 날렸고, 이곳 동해대로 일대는 오후 늦도록 탄 냄새가 진동했다. 4차선 도로 옆으로는 집과 일터를 잃은 주민들이 쭈그려 앉아 잿더미로 변한 터전을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토성면 용천1리에 사는 김정녀 씨(65)는 “강원도 지역에 50년 가까이 살면서 이런 산불은 처음”이라며 “손녀 신발도 신기지 못한 채 죽자살자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공장 등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 '망연자실'
"마을방송 훈련으로 알아…대피문자가 고작"
"손녀 신발도 못신긴 채 죽자살자 뛰쳐나와"
“집과 일터 모두 잃어”이날 토성면 봉포삼거리 인근에서 만난 신성총포사 사장 정모씨(53)는 까맣게 그을린 1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며 “2층에 있던 집이 모두 타버리고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씨는 불과 하루 전까지 1층 작업실에선 총기를 제작하고 2층에서는 가족과 생활했다. 그는 “집에 불이 처음 붙었을 땐 소화기로 어떻게든 진압해보려 했지만 주먹만한 불똥이 비처럼 내리는 상황에 곧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차 안에서 집이 타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만 봤다”고 했다.
강원 속초시 장사동 동해대로 옆에서 만난 한영도 속초유통 대표도 “전 재산이 다 날아갔다”고 하소연했다. 인근 군부대에 생필품을 납품하는 한 대표는 검게 그을린 건물과 군납품들을 가리키며 “사업장이 눈앞에서 불에 타고 있는데 밤새도록 한 일이라고는 발을 구르는 게 전부였다”고 토로했다.
그는 “4일 밤 11시부터 5일 새벽까지 창고 등 사업장 661㎡ 모두가 불에 탔지만 소방차는 산불을 진압하는 데 바빠 오지 못했다”며 “새벽에서야 소방차가 다 타버린 공장에 와서 잔불 정리를 해줬다”고 전했다.“다들 자고 있는데 대피 문자가 전부”
대피소로 피신한 주민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대처가 미흡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주민대피소에서 만난 김모씨는 “어제 밤부터 마을 방송이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나왔지만 긴박감이 전혀 없이 느릿느릿 말하길래 평소의 훈련상황인 줄 알았다”며 “마지막 방송을 듣고서야 실제 상황이라고 느껴 맨발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들은 보통 밖에서 일하기 때문에 마을방송에 의존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정부나 지자체가 마을방송을 책임지는 담당자를 상대로 재난방송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토성면 용촌 1리에서 대피소로 왔다는 최모씨는 아예 재난문자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최씨는 “재난문자가 오지 않았고, 시골 사람들은 일찍 자기 때문에 문자를 일일이 챙기지도 못한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문자를 보내는 것에 더해 소방차와 구급차가 마을을 다니며 사이렌을 울려주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곳 대피소에서 만난 대다수 노인은 대피 문자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토성면 인흥리에 거주하는 강춘성 할머니(84)는 “집 옆 산자락으로 큰불이 옮긴 것을 보고서야 불이 난 줄 알았다”며 “전쟁이 다시 나는 줄 알고 논두렁으로 도망쳐 혼자 엎드려 있다가 새벽에야 서울에서 올라온 아들과 함께 대피소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논두렁에 숨은 사이 집안은 모두 타버리고 없더라”며 “집에 두고 온 약, 옷 등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천진초교로 대피한 강순녀 씨(60)도 “집 건너편까지 불이 옮겨붙던 오후 8시30분께까지 대부분 이웃은 산불이 발생한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한 이웃 주민이 직접 문을 두드리며 알려주지 않았다면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텔레비전에서라도 보다 긴급하게 알려줬어야 했다”고 말했다.
고성=정의진/임호범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