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꽃일기 쓴 할머니의 초대, 수선화·동백·매화·천리향…꽃잔치에 봄내음이 물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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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뭍에서 불과 15분 거리의 뱃길이지만 선도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선도 갯벌은 세계적 자연유산이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섬사람들은 그 갯벌에 기대어 살아간다. 한때는 면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융성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퇴락한 섬이 됐다. 6.3㎢의 땅에 163가구 200명이 살아간다. 신안군 지도읍에 속한 섬이지만 육로는 무안이 더 가깝다.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전남 신안 선도
갯벌, 선도 사람들의 생명줄섬은 주동, 매계, 석산, 대촌, 북촌 등 5개 마을이 있다. 석산과 대촌은 붙어 있어서 하나의 마을로 치기도 한다. 섬은 대체로 평야와 낮은 언덕으로 이뤄져 편안한 느낌이다. 갯벌을 간척해서 만든 논밭이 드넓다. 그래서 과거 선도 주민들은 어업보다는 농업에 기대 살았다. 쌀이 돈 되던 시절, 굳이 어업에 기대지 않더라도 섬은 곤궁하지 않았다. 외지의 어선들이 앞바다에 몰려와 낙지잡이를 할 때도 선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 들어 농사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자 비로소 어업으로 눈을 돌렸다. 외환위기 이후 육지에서 살던 출향인들이 낙향하면서 비로소 어촌계가 구성되고 마을 어업면허도 확보해 본격적인 어로 활동이 시작됐다.고향에 돌아간 사람들이 낙지잡이로 돈을 번다는 소문이 들리자 귀향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외지로 나가 사는 청년들에게 고향으로 돌아와 낙지잡이를 함께 하자고 독려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2년 거주 후 일정액을 납부해야만 어촌계 가입 자격이 주어지고 낙지잡이를 할 수 있다. 어업의 주가가 올라간 것이다. 최근 3년 동안에만 20~50대의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20여 명이나 귀향했다. 갯벌이 쇠락해가던 섬을 살리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갯벌은 마을 공동어장이 됐기에 더 이상 외지인들이 낙지를 잡을 수 없다. 오랫동안 돌아보지도 않던 갯벌이 이제 선도 사람들의 생명줄이다. 섬은 오랫동안 농경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왔으니 인심 또한 넉넉하다. 처음 이사 온 이웃에게 식량 하라고 쌀 몇 가마니를 그냥 나눠주는 일도 흔하다. 마을공동체가 사라진 시대, 드물게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섬이다.
그래도 섬은 여전히 노인들이 주류다. 경제력 있는 사람은 전체 가구의 절반도 되지 못한다. 163가구 중 60여 가구만 실제 경제 활동을 한다. 20여 가구가 양파농사를, 또 10여 가구가 벼농사를 짓는다. 선도 갯벌에는 감태도 많아 겨울 두 달 감태만 채취해서 소득을 올리는 가구도 5~6가구나 된다. 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돈벌이는 30여 가구가 참여하는 낙지잡이다. 선도는 낙지 섬이다.선도 사람들은 맨손 낙지잡이도 하지만 대다수는 낚싯바늘을 연달아 매단 주낙(연승어업)으로 잡는다. 미끼는 주로 서렁게(칠게)를 쓰는데 예전에는 갯벌에서 직접 잡았지만 이제는 일손이 달려서 중국산을 쓴다. 낙지는 중국산이든 국산이든 가리지 않고 먹이를 노리다 걸려든다. 주낙 낙지잡이는 물의 흐름이 거의 없는 조금 때가 적기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물이 너무 탁하거나 바닥에 파래가 자라기 시작해도 낙지잡이가 어렵다. 낙지는 주로 밤에 전깃불을 밝히고 잡는데 가장 잘 잡히는 때는 달이 밝을 때다. 이때를 달사리라 부르고, 이때 잡힌 낙지를 달사리 낙지라 한다. 고요한 밤바다 달빛 아래 낙지 잡는 풍경은 그야말로 꿈속인 듯 아련하다.섬 주민의 절반인 80가구가 밀양 박씨
오랜 세월 많은 섬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오지 중의 오지로 여겨지던 섬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치고 사연 없는 이가 누가 있을까. 조선왕조의 공도 정책으로 섬 거주가 금지되다 다시 풀린 것은 임진왜란 전후다. 선도에도 이 무렵부터 주민 거주가 시작됐다.주동은 1588년에 순흥 안씨가, 대촌은 1591년에 김해 김씨가, 매계 마을은 1638년에 밀양 박씨가 입도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그래서 마을은 대부분 한 조상의 후예들인 집성촌으로 역사를 이어 왔다. 특히 선도는 밀양 박씨가 번성해서 한때 박씨도라 불렸을 정도다. 지금도 섬 주민의 절반인 80가구가 밀양 박씨다. 그야말로 박씨 섬, 씨족 섬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김씨도 30가구나 되니 선도는 그대로 씨족국가다. 수많은 섬에서 집성촌을 목격했지만 이처럼 단일 성씨가 아직도 다수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도의 박씨 씨족은 정변에 휘말려 섬살이가 시작됐다. 밀양 박씨 숙민공의 후손인 박종학은 인조반정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자 처음 해남의 후산리로 도피해서 은신해 있다가 그마저 불안하자 선도로 숨어들어왔다. 매계리 마을 회관 앞의 박양환, 박계환 유지비에 그 사연이 적혀 있다.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해남에 숨어 살던 박종학은 아들인 박양환과 박계환을 데리고 1799년에 선도로 입도해 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 살았다. 깊은 학식으로 후학을 양성해 박처사라 불렸다. 이후 선도에는 박씨의 후손 수백호가 살게 됐다. 박종학이 처음 터를 잡고 살았던 매계리는 여전히 박씨 마을이다.
수선화가 관광 자원
근래 선도는 수선화 마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수선화 할머니로 불리는 현복순 할머니 덕이다. 주동 마을 교회 앞, 정원이 아름다운 할머니 댁 입구에는 ‘수선화의 집’이란 비석이 서 있다. 할머니의 수선화 가꾸기 덕에 선도에서는 올해 첫 번째 수선화 축제가 열렸다. 들판 곳곳에는 마늘, 대파 등과 함께 수선화가 가득 심어져 있다. 수선화 재배는 그냥 꽃만 보고 며칠 관광객이나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농사다. 수선화 구근은 번식이 아주 빠른 데다 농작물보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 꽃도 보고 구근도 팔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다.활짝 열린 수선화의 집 정원으로 들어서니 진한 꽃향기가 폐부를 찌른다. 정원에서는 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정원이 온통 수선화 밭이다. 선도의 수선화는 4월 중순부터 만개한다. 노란 수선화는 2주 정도, 하얀 수선화는 수명이 더 길어 한 달이나 간다. 20년 동안 꽃일기를 써온 현복순 할머니는 꽃들의 개화 시기가 해마다 거의 정확하다고 말한다. 기온에 따라 앞뒤로 2~3일 편차가 있을 뿐 그 이상 차이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원에는 수선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종 동백과 애기 동백, 매화나무가 드문드문 자리해 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꽃양귀비 구근도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 진한 꽃향기의 원천은 할머니 집 창문 앞에 심어진 세 그루의 천리향이다. 향이 진짜 천리까지 날아가기야 하겠는가마는 사람이나 새의 깃털에 묻은 향은 천리도 갈 만큼 진하다. 그래서 천리향이라 했던 것일까!
할머니가 선도로 들어온 것은 삼십 몇 년 전이다. 2019년, 올해 89세 고령인데도 대부분의 기억이 뚜렷하다. 선도는 남편의 고향이었다. 아내의 고향은 목포. 남편은 12년 전, 80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선도 최고 부잣집 아들이었던 남편은 고려대학을 졸업했고 아내는 목포에서 여고(여중여고통합과정)를 졸업했다. 아내도 ‘큰 기와집’이라 불리던 목포의 부잣집 둘째 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남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남편은 목포에서 교사를 했고 부산에서는 법원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객지를 떠돌며 살았다. 마지막으로 서울 살 때 남편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했다. 아내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자녀들을 출가까지 시켰으니 서울에 더 있을 이유도 없어 선도로 들어왔다.
현복순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꽃을 좋아했다. 친정인 목포 큰 기와집은 정원이 넓었고 덩굴장미며 천리향, 치자꽃이 사철 번갈아 피고 졌다. 꽃 속에서 자랐으니 꽃에 물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선도에 돌아온 뒤 들판 한가운데 2314㎡의 땅에 덩그라니 작은 집 한 채를 지었다. 많은 땅이 남았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집 주위로 먼저 개나리를 심어서 울타리 삼았다. 군데군데 덩굴장미를 심어 이 또한 울타리 삼았다. 초봄부터 개나리가 피었다 지면 5월부터는 장미가 만개해 꽃물을 들였다. 꽃담에 둘러싸인 집. 그 후 육지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하나둘 꽃들을 사다 심고 가꿨다. 할아버지는 피어난 꽃만 즐길 뿐 잡초 한 번 뽑아주지 않았다. 꽃양귀비와 백합도 사다 심었다. 수선화는 20여 년 전 진도의 어느 농장까지 찾아가 구근을 두 자루나 사다가 심었다. 할머니는 흰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수선화 중에서도 유독 흰 수선화 꽃을 많이 심었다. “은은하고 고결한 향기가 좋아요.”
동백, 수선화, 백합 등 꽃 잔치 벌어져
해마다 수선화 구근을 옮겨 심다 보니 어느새 앞뜰, 뒤뜰 할 것 없이 집 주변을 온통 수선화가 둘러싸고 말았다. 그래서 할머니의 집은 “일년 열두 달 꽃이 지지 않는 집”이 됐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처럼 꽃이 지지 않는 꽃의 제국. 장미와 개나리가 집밖 담장 밖을 물들일 때 담장 안에서도 꽃 잔치가 벌어진다. 1~3월까지는 동백과 매화가 피고 지고, 4월에는 수선화가 만개하고, 5~6월이면 양귀비꽃밭이 된다. 7월에는 백합이, 8월에는 핑크보라 상사화가, 9월에는 꽃무릇 상사화가 피어난다. 꽃 지고 난 다음에야 잎이 자라나 평생 꽃과 잎이 서로를 보지 못해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상사화 철이 지나면 10월부터 12월까지는 국화가 뒤따른다. 과연 일년 열두 달 꽃피지 않는 때가 없다.
할머니는 해마다 더 심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꽃을 심었다. 30년 넘게 꽃만 가꿨다. 할머니가 꽃을 심은 것은 스스로 좋아해서기도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라는 뜻도 있다. 돈벌이 되는 농사는 안 짓고 꽃만 가꾸니 지나가던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내내 꽃밭의 풀만 맸다. “꽃 팔아서 단돈 1000원도 벌어본 적 없다. 물론 서울 아파트를 처분했고 모아둔 재산도 조금 있어 농사짓지 않고도 꽃만 가꿀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가능한 꽃 살림이었겠는가?
할머니는 지금도 꽃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생각할수록 꽃이 고맙고 또 고맙다. “꽃이 없었으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꽃을 가꾸면서도 늘 “혼자 보기 아깝다”고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런 소망이 이뤄진 것일까. 할머니가 심은 수선화 구근 하나가 자라 선도의 온 들판으로 퍼져나갔다. 13만2231㎡ 수선화 꽃밭, 이제 선도는 진짜 수선화 꽃 섬이 됐다. 봄날 섬의 꽃 잔치, 수선화 축제는 끝났지만 섬은 지금부터 진짜 축제가 시작된다. 4월 말까지 수선화가 절정이다. 선도는 문득 꽃 하나 가꾸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온통 환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섬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