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에게 위기는 기회…경영환경 어려워도 도전 멈추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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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업 영웅‘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다산경영상 수상자 신춘인사회
"기업 옥죄는 규제 한꺼번에 쏟아지지만
힘들 때마다 기업가정신은 더욱 빛난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요즘 기업 환경을 이렇게 진단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다산경영상 역대 수상자 2019년 신춘인사회’에서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준비되지 않은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기업 경영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겹치며 기업을 옥죄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서도 ‘기업 영웅’들은 꿋꿋하게 새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법정관리까지 갔던 웅진코웨이를 되찾으며 ‘렌털 신화의 부활’을 알렸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은 “한국을 벗어나 글로벌 브랜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기업가정신은 어려울 때 더 빛난다’는 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산경영상은 한국경제신문사가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제정했다.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
“10대 후반부터 삼촌 밑에서 ‘장사’를 시작한 나에겐 도전하는 DNA가 있다. 25년 전 부도로 ‘무일푼’이 된 뒤 죽으려 한 순간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 여기까지 왔다. 사업을 다각화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다른 그룹과 다르게 오직 ‘패션 한우물’만 팠다. 내가 옷 장사에 특히 자신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2016년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까스텔바작을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한국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브랜드를 키울 때라고 생각했다. 3년 안에 중국에서 까스텔바작 붐을 일으키겠다. 인천 송도에 1500억원을 투자해 글로벌패션복합센터를 짓는다. 내년 완공 예정인 이곳을 ‘K패션’의 글로벌 전초기지로 삼겠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꿈’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웅진코웨이를 매각하고 난 뒤 ‘회사를 되찾아오겠다’는 다짐을 한 달에 10번 이상 했다. 지금까지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기업을 되찾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 선제적으로 계열사를 매각해 빚을 갚고 채권단의 신뢰를 얻었다. 수개월간 검찰과 금융감독원 조사를 받았지만 한 건의 개인 비리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고마운 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도 핵심 인재들이 떠나지 않고 회사를 지켜줬다는 점이다.‘타이밍’도 좋았다. 사상 최악의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청정기 주요 제품은 한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없어서 못 판다. 지난해 미국 아마존과 손잡고 에어메가라는 제품을 출시했는데 첫해부터 ‘대박’이 났다. 렌털 시장은 가구, 타이어까지 무궁무진하게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웅진코웨이와 함께 ‘새로운 꿈’을 꾸고자 한다.”
조선, 반도체 등 ‘세계 1위’를 지켜내기 위한 기업인들의 절박함도 느낄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기회’를 찾는 기업가정신이 엿보였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
“세계 시장에서 한국이 1등을 하는 산업은 조선과 반도체뿐이다. 지금 조선산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출혈 경쟁으로 한국이 세계 1등 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세계 조선 시장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세계 1·2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이라는 빅딜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다. 노조의 반대도 극복해낼 자신이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42년 내내 부딪혔지만 ‘1~2% 더 주자’는 마음가짐으로 나서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최근 한·일, 한·중 관계가 악화돼 앞으로 있을 해당국 기업결합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어려움을 딛고 앞으로 30~50년을 더 견뎌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조선산업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내 일생을 걸고 반드시 ‘한국조선해양’(통합 법인의 지주회사)을 성공시키겠다.”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
“SK하이닉스는 정말 어려웠던 시절 국민 덕분에 살아남은 기업이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 2017~2018년 ‘반도체 슈퍼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2015년 경기 이천에 공장을 지어놓은 덕분이었다. 적기 투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사업이 정부(국토교통부 수도권정비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면서 또 한번 투자의 기회를 갖게 됐다.
(반도체값이 급락하면서) 요즘 반도체 시황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2분기까지는 상황이 좋지 않겠지만 그 이후에는 회복될 것으로 본다. 반도체 업황이 주춤하는 게 한국 기업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주요 업체만 보면 D램 공급사는 세 곳, 낸드플래시 공급사는 다섯 곳가량인데, 이번 반도체 업황 하강국면을 계기로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
박진수 LG화학 이사회 의장
“LG화학이 글로벌 10대 화학회사로 성장한 배경에는 ‘배터리’가 있다. 돌아가신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뚝심있게 투자하고,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묵묵히 기다려주신 덕분이다. LG화학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터리를 생산하는 회사 중 하나다.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액은 100조원에 달한다. 지금은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지만, 그다음에 한국 경제를 끌고가는 것은 결국 배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완근 신성이엔지 회장
“10년 전 태양광 사업을 시작한 이후 부침이 많았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태양광 업체에 주는 보조금 규모를 크게 축소하자 국내 태양광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지난해 말 미국 3개 회사와 장기 계약을 한 덕분에 공장을 다시 돌리고 있다.
태양광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지원해줄 일이 많다. 태양광 업체인 웅진에너지와 OCI가 적자에 시달리는 이유는 비싼 전기료 탓이다. 제품 원가의 30%를 차지한다. 전기료 차등화 정책을 적용하는 독일처럼 한국 정부도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에는 할인 혜택을 줘야 경쟁력이 살아난다. 앞으로 차별화된 고효율 태양광 제품을 개발해 승부를 내겠다. ‘태양광 사업 덕분에 돈 버는 회사’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버틸 것이다.”
한국의 기업 환경을 고민하는 목소리도 절절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의 조직문화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현재 우리 기업들이 걱정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지에 관해 화두를 던졌다.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
“기업인을 만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총체적 위기’라고 말한다. 위기의 정도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이다. 여기 모인 연륜있는 기업인들이 한국 경제가 어려울 때 힘을 보탤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다. ‘한국 경제 경영진단팀’을 꾸려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경영 진단을 해주는 건 어떨까.”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최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전임 원장을 만났다. 그는 ‘사이버 전쟁 시대를 한국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느냐’는 화두를 던졌다. 북한이 세계적인 해킹 전문가들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사이버 보안에 관심을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신배 포스코 이사회 의장
“세계 휴대폰 시장 1위를 달리던 노키아가 아이폰 등장 후 4년 반 만에 주가가 10분의 1 토막 난 건 무수한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조직문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직원들이 주인의식 없이 자신의 성과를 강조하는 데만 급급해 전체 위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드뉴스(나쁜 소식)보다 나쁜 건 노뉴스(무소식)’다.”
개인사를 전하며 앞으로의 역할을 탐색하는 기업인도 있었다.
김중겸 전 한국전력 사장
“지난 50년간 한국이 발전한 경험을 개발도상국에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선 주택정책 컨설팅을, 케냐에선 산업정책 컨설팅을 맡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 비결을 개발도상국에 ‘이식’하고자 한다.”
배영호 전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10년간 암 투병을 했는데, 투병 생활도 비즈니스와 똑같다. 암 진단을 받자마자 사표를 내고 교외로 떠났다. 경영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의사결정이 주효했다. 나의 투병기가 마음고생으로 병을 얻은 기업인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명복을 빈다.”
고재연/심성미/민지혜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