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G 세계 최초 상용화' 타이틀이 뭐길래…스마트폰 제조사와 통신사들의 진흙탕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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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이동통신 업체들은 ‘멘붕’에 빠졌다. 미국 이동통신 업체 버라이즌이 당초 11일로 예정했던 5G(5세대 이동통신) 상용화 시점을 4일로 앞당긴다는 소문이 돌아서다. ‘세계 최초 5G 서비스 상용화’ 타이틀을 놓칠지 모른다고 판단한 한국 통신사들은 3일 밤 기습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5일이었던 상용화 스케줄을 이틀 앞당겼다.
겉으로 드러난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한국은 어쨌거나 버라이즌보다 55분 빨리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기록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버라이즌은 한국시간으로 4일을 넘어선 시점에 시카고와 미니애폴리스 일부 지역에서 5G 서비스에 나섰다.첩보전을 방불케 한 5G 상용화 경쟁의 이면엔 관련 업계의 복잡한 사정이 맞물려 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이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줬다.◆AT&T가 ‘5G 속도전’ 불 지펴
버라이즌의 서비스는 진정한 5G로 보기 어렵다. LTE(4세대 이동통신)폰에 5G 모듈인 ‘디바이스 모토모드’를 덧붙이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다. 5G 전용폰도 없는 상태에서 5G 서비스를 시작한 셈이다.한국 업계에서 버라이즌의 5G를 ‘4.5G’, ‘반쪽 5G’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다. 아직 전국에 기지국을 완전히 구축하지 못했지만 요금제와 단말기까지 갖춘 한국이 이런 버라이즌의 꼼수에 굳이 반응해야 했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래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격을 스스로 떨어뜨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업계에선 버라이즌이 변칙적인 방법으로 5G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경쟁사인 AT&T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일부 AT&T 이용자들의 스마트 폰에 ‘LTE’ 대신 ‘5GE’라는 문구가 떴다. AT&T가 5G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오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AT&T는 ‘5GE’가 ‘5G Evolution(진화)’의 약자이며 5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미국 내 경쟁업체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T모바일은 ‘9G’ 스티커를 붙인 스마트폰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AT&T의 논리대로면 자신들은 9G 서비스를 시작한 셈이란 비아냥이었다. 스프린트는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AT&T의 ‘5GE’ 사용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소송까지 냈다.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5G라는 단어가 주는 혁신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며 “AT&T의 ‘5GE 마케팅’과 버라이즌의 ‘꼼수 5G’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5G폰 출시 일정 논란
한국에서도 급박하게 5G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웃지 못할 일들이 잇따랐다. 정부는 5G 상용화 시기를 3월28일로 못 박았지만 결국 4월로 출시 시기가 미뤄졌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출시일을 맞추지 못했다.LG전자는 퀄컴에서 5G폰의 핵심 부품인 모뎀칩을 공급받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자체 칩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술적 보완을 이유로 출시일을 미뤘다. 현재 5G 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의 ‘갤럭시 S10 5G’가 유일하다. LG전자의 5G 스마트폰 ‘V50 씽큐 5G’는 오는 19일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업계에선 “4월에 5G폰이 나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동통신 표준화 국제기구인 3GPP가 5G폰 모뎀칩의 표준을 내놓은 것은 지난해 9월과 12월이다. 9월 표준의 문제점을 개선해 12월 표준을 확정했다.
퀄컴 관계자는 “과도기적인 성격인 9월 표준 대신 12월 표준을 기준으로 모뎀칩을 만들고 있다”며 “3개월 여 만에 칩을 내놓는 것도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S10 5G의 출시 일정을 감안, 9월 표준으로 모뎀칩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최초 타이틀을 정부의 업적으로 삼으려는 게 문제란 지적도 나온다.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은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 참석해 5G 관련 업체들을 독려했다. 유 장관이 LG전자 부스를 방문해 “올해 1분기까지 5G 스마트폰을 출시할 수 있는지”를 묻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업계 일각에선 유 장관이 LG전자 실무자의 발언을 확대 해석해 3월28일 출시를 선언한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5G폰은 엄두도 못 내는 애플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맞수인 애플은 5G 스마트폰 출시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애플에 모뎁칩을 납품하는 인텔이 올해 5G칩을 내놓을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퀄컴은 대안이 아니다. 애플은 2017년부터 퀄컴과 특허권 소송을 진행하면서 견원지간이 됐다. 최근엔 삼성전자에도 5G 모뎀칩을 공급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퇴짜’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림픽 공식 스폰서인 인텔은 2020년 도쿄하계올림픽을 계기로 ‘5G=인텔’ 이미지를 심을 계획이다. 5G폰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는 시점을 내년 이후로 봤다는 해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초기의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고 조용히 실리를 챙기는 게 인텔의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인텔의 판단처럼 현재의 5G 서비스는 아직 불완전하다. 세계 최초로 5G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단 전국에 구축된 5G 기지국이 LTE 기지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5G 전용폰을 구입하더라도 ‘5G’ 대신 ‘LTE’가 잡히는 지역이 많다는 얘기다.당장 LTE보다 20배 빠른 20Gbps의 속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현재 통신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파대역에선 이 속도를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말 28Ghz 대역의 기술표준이 정해지고, 망 구축이 시작되는 내년 이후에야 진정한 5G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
겉으로 드러난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한국은 어쨌거나 버라이즌보다 55분 빨리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기록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버라이즌은 한국시간으로 4일을 넘어선 시점에 시카고와 미니애폴리스 일부 지역에서 5G 서비스에 나섰다.첩보전을 방불케 한 5G 상용화 경쟁의 이면엔 관련 업계의 복잡한 사정이 맞물려 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이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줬다.◆AT&T가 ‘5G 속도전’ 불 지펴
버라이즌의 서비스는 진정한 5G로 보기 어렵다. LTE(4세대 이동통신)폰에 5G 모듈인 ‘디바이스 모토모드’를 덧붙이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다. 5G 전용폰도 없는 상태에서 5G 서비스를 시작한 셈이다.한국 업계에서 버라이즌의 5G를 ‘4.5G’, ‘반쪽 5G’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다. 아직 전국에 기지국을 완전히 구축하지 못했지만 요금제와 단말기까지 갖춘 한국이 이런 버라이즌의 꼼수에 굳이 반응해야 했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래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격을 스스로 떨어뜨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업계에선 버라이즌이 변칙적인 방법으로 5G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경쟁사인 AT&T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일부 AT&T 이용자들의 스마트 폰에 ‘LTE’ 대신 ‘5GE’라는 문구가 떴다. AT&T가 5G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오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AT&T는 ‘5GE’가 ‘5G Evolution(진화)’의 약자이며 5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미국 내 경쟁업체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T모바일은 ‘9G’ 스티커를 붙인 스마트폰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AT&T의 논리대로면 자신들은 9G 서비스를 시작한 셈이란 비아냥이었다. 스프린트는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AT&T의 ‘5GE’ 사용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소송까지 냈다.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5G라는 단어가 주는 혁신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며 “AT&T의 ‘5GE 마케팅’과 버라이즌의 ‘꼼수 5G’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5G폰 출시 일정 논란
한국에서도 급박하게 5G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웃지 못할 일들이 잇따랐다. 정부는 5G 상용화 시기를 3월28일로 못 박았지만 결국 4월로 출시 시기가 미뤄졌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출시일을 맞추지 못했다.LG전자는 퀄컴에서 5G폰의 핵심 부품인 모뎀칩을 공급받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자체 칩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술적 보완을 이유로 출시일을 미뤘다. 현재 5G 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의 ‘갤럭시 S10 5G’가 유일하다. LG전자의 5G 스마트폰 ‘V50 씽큐 5G’는 오는 19일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업계에선 “4월에 5G폰이 나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동통신 표준화 국제기구인 3GPP가 5G폰 모뎀칩의 표준을 내놓은 것은 지난해 9월과 12월이다. 9월 표준의 문제점을 개선해 12월 표준을 확정했다.
퀄컴 관계자는 “과도기적인 성격인 9월 표준 대신 12월 표준을 기준으로 모뎀칩을 만들고 있다”며 “3개월 여 만에 칩을 내놓는 것도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S10 5G의 출시 일정을 감안, 9월 표준으로 모뎀칩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최초 타이틀을 정부의 업적으로 삼으려는 게 문제란 지적도 나온다.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은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 참석해 5G 관련 업체들을 독려했다. 유 장관이 LG전자 부스를 방문해 “올해 1분기까지 5G 스마트폰을 출시할 수 있는지”를 묻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업계 일각에선 유 장관이 LG전자 실무자의 발언을 확대 해석해 3월28일 출시를 선언한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5G폰은 엄두도 못 내는 애플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맞수인 애플은 5G 스마트폰 출시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애플에 모뎁칩을 납품하는 인텔이 올해 5G칩을 내놓을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퀄컴은 대안이 아니다. 애플은 2017년부터 퀄컴과 특허권 소송을 진행하면서 견원지간이 됐다. 최근엔 삼성전자에도 5G 모뎀칩을 공급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퇴짜’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림픽 공식 스폰서인 인텔은 2020년 도쿄하계올림픽을 계기로 ‘5G=인텔’ 이미지를 심을 계획이다. 5G폰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는 시점을 내년 이후로 봤다는 해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초기의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고 조용히 실리를 챙기는 게 인텔의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인텔의 판단처럼 현재의 5G 서비스는 아직 불완전하다. 세계 최초로 5G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단 전국에 구축된 5G 기지국이 LTE 기지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5G 전용폰을 구입하더라도 ‘5G’ 대신 ‘LTE’가 잡히는 지역이 많다는 얘기다.당장 LTE보다 20배 빠른 20Gbps의 속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현재 통신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파대역에선 이 속도를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말 28Ghz 대역의 기술표준이 정해지고, 망 구축이 시작되는 내년 이후에야 진정한 5G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