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農 가부장이 빈곤서 일으켜 세운 '우골탑'…기적성장 밑거름 되다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48) 마지막 소농사회
자급적 생존경제

1956년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65%였다. 농림어업의 취업 비중은 그보다 높은 78%였다. 도시에서 실업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농가의 경지는 평균 0.9㏊(약 2722평)의 영세 규모였다. 1950년대 한국인의 3분의 2는 영세 소농으로서 자급적 생존경제에 침잠했다. 초창기 국가경제는 전적으로 이 생존경제의 희생 위에서 꾸려졌다. 정부는 도시 인구의 식량을 확보하고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킬 목적에서 농가에 대한 제반 수취를 현물로 행했다. 1951년 현물 토지세는 생산량의 20%를 점했다. 정부는 농가에 비료를 공급하면서 그 대금을 양곡으로 수취했다. 정부는 양곡을 강제로 매입했는데, 수매가격은 시가의 절반에 불과했다. 농가에 대한 정부의 압박은 전쟁이 끝난 뒤 1956년 이후가 돼서야 조금씩 완화됐다.
1960년대의 우시장(牛市場). 대학 등록금 납입 철이 되면 시골 농가에서 키우던 소들이 우시장에 쏟아져나와 소값이 떨어지곤 했다.
그사이 농업은 정체했다. 농가의 재생산에서 시장거래 비중은 일정기보다 후퇴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농촌에서 화폐가 사라지고 미곡 등 현물이 주요 거래수단으로 등장했다. 대부분 농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춘궁기가 되면 절반 이상의 농가에서 양식이 떨어졌다. 1959년 부채 농가의 비율은 91%나 됐다. 부채는 연리 60% 이상의 고리대였다. 농촌사회가 자급적 생존경제로 후퇴하면서 일정기에 사라진 장리(長利)가 부활했다. 1950년대 한국은 17세기 이래 소농사회의 마지막 자락에 해당했다. 농촌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경제와 문화도 소농사회와 굵은 탯줄로 이어져 있었다.

가족

소농사회의 기초 단위로서 가족의 크기는 1955년 국세조사에서 평균 5.5명이었다. 가족 형태는 부모와 가계를 계승할 자식 부부가 동거하는 직계가족이 표준이었다. 17세기부터 조금씩 확산해온 직계가족은 20세기 들어 한국인의 이상적 가족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와 별개로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호적에 등록된 호주제 가족이 있었다. 차남 이하는 결혼 이후 본가로부터 분거하는 게 보통이지만, 상당 기간 아버지 호의 구성원으로 남아 가족적 결합을 유지했다.1961년 경남 언양면 호적에서 호의 구성원은 평균 8.3명에 달했다. 호주제 가족은 일반적으로 개별 가족 1.5개가 합쳐진 복합가족 형태였다. 부-자-손으로 이어진 3대의 혈연공동체는 사실상 한 가족으로 결속했다. 이 사실은 동시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부계(父系) 친족의 질서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광산 김씨 문중의 묘제. 문중은 연간 두 차례 묘제를 통해 제사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광억 촬영
당내와 문중

가족의 바깥에는 고조(高祖)를 같이하는 친족집단이 존재했는데, 당내(堂內)라 했다. 당내의 성원은 고조 이하 모든 조상의 제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명절을 맞아 거행하는 당내 제사는 집집을 돌면서 오후가 돼서야 겨우 끝났다. 그것이 1960년대까지 전국 도처의 동성부락에서 쉽게 목도하는 세시풍속도였다. 또 당내는 성원의 혼례와 장례에 동참했다. 소농사회는 여전히 유교의 생활윤리로 통합됐다. 제사, 혼례, 장례는 소농사회의 성원이 그의 신분과 가격(家格)을 과시하는 중요 의례였다. 당내는 상당한 지출을 요하는 제반 의례를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집단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의례공동체였다.당내의 바깥에는 5대 이상의 종(宗)으로 결속한 문중(門中)이 존재했다. 문중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조상의 묘에서 연간 2회 거행하는 묘제를 통해서였다. 묘제는 문중의 종손 내지 종파에 의해 주관됐다. 원근 각지에 산재한 문중의 성원은 묘제 거행을 통해 그들이 전래의 양반 신분임을 과시했다. 문중의 본질은 제사공동체로서 위세조직이었다. 한참 뒤의 조사이긴 하지만, 경남 산청의 경우 주민의 40%가 문중이 과시하는 족보, 묘제, 석물, 재실(齋室) 등을 통해 자신을 양반 신분으로 감각했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신분 감각

1950년대 한국인은 그들의 원 신분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반상(班常)의 차별은 20세기 초 근대적 법제의 성립과 더불어 공적 영역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문화적 위세와 차별로서 신분 감각은 해소되지 않았다.전통적으로 양반 신분의 위세가 강한 지방에서는 해방 후까지 반상의 차별과 지배가 이어졌다. 마을의 상민은 양반가의 장례에 상여꾼으로 동원됐다. 유명 반촌에서는 노비류의 천민이 잔존했다. 그런 역사의 유제가 사라지는 것은 농지개혁 이후였다. 그럼에도 소농사회의 성원은 여전히 그 신분 감각에서 평등하지 않았다. 결혼은 동일 신분 간 내혼(內婚)이 지배적이었다. 사람들이 당내 결속과 문중 유지에 성의를 다한 것은 그런 신분 감각에서였다.

신분 감각은 농촌 주민의 협동을 방해했다. 죽은 자를 상여에 태우는 것은 종래 양반 신분의 특권이었다. 이제 상민은 상민끼리 상여계를 조직해 죽은 아버지를 꽃상여에 태웠다. 상민이 양반으로 승격하는 의례였다. 한국 현대의 민주화는 유교적 의례의 평등화를 통해 이뤄졌다. 양반과 상민이 섞여 사는 동리에서는 두 개의 상여계가 결성돼 대립했다. 그것이 하나로 통합돼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가 달성되는 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의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때까지 농촌 곳곳에는 문중의 위세를 알리는 재실이 활발하게 건립됐다. 그런 전 국민의 양반화 물결이 멈춘 것은 몇 개 면의 사례에 의하면 1980년대 일이다.

장시

1950년대 농촌 주민의 공동생활권으로서는 반상의 갈등을 안은 동리보다 닷새마다 열린 장시가 더 중요했다. 한국인은 폐쇄적인 동리보다 개방적인 장시에서 자유를 호흡했다. 1938년 남한의 장시는 모두 895기였다. 이후 전시기에 크게 감소해 1945년 해방 당시에는 407기에 불과했다. 이후 조금씩 늘어 1960년까지 826기로 회복됐다.

장시의 배치와 밀도를 결정하는 요인은 인구의 크기였다. 그런 연관에서 장시는 여전히 소농의 자급적 재생산을 보조하는 단순 상품생산의 무대였다. 농민들은 대개 월 3~4회 출시해 가정의 잉여생산물을 팔고 비자급 생활 자료를 샀다. 농민들은 장날에 관공서 용무를 보거나, 친지와 교유하거나, 바깥세상의 정보를 구하거나 음주와 오락에 마음을 풀었다.

장시를 구성하는 상인은 여전히 이동상인이었다. 점포를 가진 정주상인은 중간시장 이상의 큰 장시에서나 볼 수 있었다. 장시 간에는 물화를 모으고 흩는 기능에 따라 기층시장-중간시장-중앙시장의 위계가 성립해 있었다. 중간시장은 대개 군청 소재지고, 중앙시장은 도 단위로 두셋 정도가 보통이었다. 기층시장과 주변의 농촌은 도보로 연결됐다. 기층시장과 중간시장, 중간시장과 중앙시장 간에는 하루 몇 차례 완행버스가 왕복했다. 중학교, 병원, 극장 등의 문화시설은 중간시장 이상에나 분포했다.

우골탑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세계사를 ‘극단의 시대’라고 묘사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 공산혁명과 좌절, 자본주의의 발전, 여성의 해방 등 세계사는 지옥과 천당을 경험했다. 도무지 될성부르지 않던 후진국의 경제 개발도 극단의 한 구성이었다. 그 첨단에 한국 경제가 있었다. 홉스봄은 한국이 기적적 성장을 이룩한 요인으로 이 나라가 세운, 세계적으로 희귀한 우골탑(牛骨塔)에 주목했다.

한국의 대학은 고귀한 학문 정신의 상아탑이 아니라 소농의 가부장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소 팔아 세운 탑이었다. 가계의 상속자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소농의 가부장이 추구한 생애 최고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농가의 재생산에 불가결한 소까지 내다 판 것이다.그런 농가의 생애 전략은 소농사회의 역사와 더불어 성숙해왔다. 1950년대에 이뤄진 몇 차례 사회학적 조사에서 농민들은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교육을 꼽았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대학생 수는 3만8000명에 불과했다. 그것이 1970년까지 14만6000명으로 늘었다. 그해 대학 진학률은 27%였다. 동일 소득 수준의 다른 후진국에서 보기 힘든 문화 현상이었다. 한국 소농사회는 겉보기엔 빈곤과 침체의 늪이지만 다음 세대의 기적적 성취를 지지한 값진 유산을 남겼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