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오면 선원은 파도가 아니라 선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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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회장의 아름다운 은퇴김재철 회장의 경영 현장은 바다였다. 그의 아호는 ‘자양(滋洋)’. ‘큰 바다가 평생 나를 키웠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 담겼다. 스물셋에 무급 항해사로 시작해 선장으로, 경영인으로 활동한 기간 내내 그의 무대는 바다였다. 그 바다에서 인생과 기업 경영의 모든 것을 깨우쳤다. 바다는 두려움도 없애줬다. 그는 “배 타고 나갔을 때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육지에서 아무리 무슨 일이 터져도 더 큰 일은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바다 위에서 생과 사를 넘나든 시간이 동원그룹과 김 회장의 반세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인터뷰와 어록을 통해 선장 김재철의 경영원칙을 정리해봤다.(1) 태풍이 오면 선원은 선장을 본다김 회장의 리더십도 바다에서 탄생했다. 수십 명 선원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을 20대 때부터 짊어졌다. 폭풍이 몰아칠 때 선장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담담함이 보이면 선장의 지시를 잘 따라가지만 선장이 불안해하면 동요는 더 커진다. 그가 생각하는 리더의 최고 덕목은 ‘희생’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만이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며칠 전 그는 아들들을 불렀다. 은퇴하겠다고 말한 뒤 다시 한번 당부했다. “겸손해라, 공부해라, 그리고 희생해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다면 사업을 하고, 할 수 없다면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해라.”
삶과 죽음 넘나드는 항해에서
터득한 7대 경영철학
(2) 폭풍우가 지나면 큰 어장이 형성된다
인수합병(M&A)과 신사업 진출은 위기를 거친 뒤에 이뤄졌다. 1970년대 1차 오일쇼크 뒤 자산보다 많은 돈으로 대형 공모선을 사들였다. 이는 세계적 수산회사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회사를 수십 개 인수했다. 대부분 경제위기가 지나간 직후였다. 사업하면서 가장 환희를 느낀 게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국 1위 참치캔 회사 스타키스트를 인수했을 때”를 꼽았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발 금융위기가 발생한 직후 시장에 매물이 나오자 김 회장은 과거 동원에는 ‘갑 중의 갑’이었던 스타키스트를 사버렸다. 적자였던 이 회사는 반년 만에 흑자 전환해 동원산업 매출과 이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3) 동원은 연안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다
1969년 수산업 창업붐이 불었다. 정부의 지원금을 노린 기업도 많았다. 대부분 원양어업 회사가 ‘OO수산’이란 이름을 썼다. 김 회장은 ‘동원산업’이라고 이름 붙였다. 멀리 가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원양기술로 연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면 더 잘할 수 있지만, 넓은 대양을 놔두고 연안에서 다른 업체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는 그의 대기업 중소기업 역할분담론으로 이어졌다. 그는 “대기업은 사업도 절도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역할을 인정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지켜줄 때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4) 본업을 버려도, 본업만 해도 망한다그에게 50년 후 동원은 어떤 회사가 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업은 환경적응업이다. 그때그때 변화에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답했다. 새로운 기회를 엿보지 않는 순간 기업은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실패도 많이 했다고 했다. 삐삐사업에 진출했고, 동원 현미경도 제작해봤다. 이런 것이 모두 새로운 시도였다. 비록 실패였지만 경험으로 회사에 축적됐다고 했다. 요즘 그는 인공지능(AI)에 빠져 있다. “미래 기술은 AI로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직접 일본책을 번역시켜 임원들에게 돌려보게 하고 있다”고 했다.
(5) 경영은 지분이 아니라 실력으로 한다
그는 1990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증여세를 내고 자식들에게 지분을 넘겼다. 두 아들이 한국투자금융그룹과 동원그룹을 경영하게 된다. ‘아름다운 은퇴’를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이다. 하지만 그는 리더는 인정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제 지분으로 회사를 경영할 때는 지났다. 실력으로 경영해 인정받아야지 지분 가지고 경영하는 것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젊어서 바다로, 세계로 나간 것처럼 자식들에게도 “미래로 나아가라”고 당부하는 이유다.디테일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참치를 잡을 때마다 배를 갈라 뭘 먹었나를 보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디테일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5단짜리 신문 기사보다 1단짜리의 작은 기사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본다고도 했다.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볼록렌즈를 가져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작은 것에도 깊이 집중하면 불이 붙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는 “배가 아무리 커도 작은 구멍 하나면 예외 없이 침몰할 수 있어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6) “노 캐치, 노 페이!”
인재와 경영자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그는 갑자기 자랑할 것이 있다고 했다. “내가 국내에서 인센티브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했다. 원시적인 산업인 수산업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증권업에 적용한 것이다.” 동원은 1982년 한신증권을 인수했다. 당시 모든 증권사는 월급제였다. 좋은 인재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회장은 배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참치를 잡은 양만큼 돈을 더 받아가는 방식이다. 1960년대에는 원양어선을 탈 때 선원들이 그물을 당겨도, 안 당겨도 똑같이 1만원을 줬다. 참치를 많이 잡을 때 더 많이 나눠주니 만선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체득했다. 그는 “배에서는 노 캐치 노 페이(no catch no pay)가 원칙이다. 고기를 못 잡으면 돈을 못 받아간다. 이를 증권사에 적용했다. 노조가 반대했지만 지금은 모든 회사가 이런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1982년 한국투자금융을 세운 이후 이를 증권업에도 적용했다.
(7) 기업도 시민이다.어떤 경영자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난감하다며 답했다. “기업도 하나의 시민이며, 그 시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는 가끔 법을 지키지 않았으면 회사에 더 큰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정도를 지킨 게 잘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경영자들에게 “악법도 법이니 제대로 지키며 정도를 걸으라”고 말한다. 이는 기업이 져야 할 의무라고 했다. 내부적으로도 정도를 지킨 것이 자랑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신입사원 면접에 들어간다. 동원의 자랑은 청탁으로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