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투자개방병원'…정치 논리에 끝내 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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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녹지국제병원 허가 취소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 출범이 결국 무산됐다. 제주도가 17일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2002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투자개방형 병원 개설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지 17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문을 연 투자개방형 병원은 한 곳도 없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녹지국제병원의 조건부 개설허가를 취소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원 지사는 “(녹지국제병원이) 정당한 사유 없이 개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원을 위한 실질적 노력도 없었다”고 허가 취소 배경을 설명했다.중국 뤼디그룹이 투자해 제주 서귀포시 토평동 헬스케어타운에 지어진 녹지국제병원은 지난해 12월 제주도로부터 의료기관 허가를 받았다. 외국인이 직접 투자해 배당도 할 수 있는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이다. 하지만 녹지국제병원은 외국인만 진료하도록 제한한 허가 조건 등에 반발해 개원을 미뤘다. 무상의료운동본부 등 시민단체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노동계,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권이 의료 민영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로 개원을 반대했다.
제주도가 녹지국제병원 허가를 취소하면서 17년간 공전한 투자개방형 병원 도입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내 투자개방형 병원 개설의 물꼬를 튼 것은 김대중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내국인도 투자개방형 병원에 투자할 수 있고 진료도 받을 수 있게 문호를 넓혔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투자개방형 병원 도입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한국이 정치 논리에 갇힌 사이 싱가포르 태국 등은 투자개방형 병원을 통해 해외 환자 등을 유치해 의료 서비스 산업을 키우고 있다.
"정권따라 정책 오락가락…이제 누가 투자개방병원에 뛰어들겠나"“녹지국제병원이 국내 투자개방형 병원의 테스트베드가 될 것입니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 12월 18일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서를 승인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방침은 3년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 제주도가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녹지국제병원을 승인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6일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국내에 투자개방형 병원은 없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시민단체 등의 개원 반발에 직면했던 녹지국제병원은 문을 열지도 못하고 결국 17일 제주도로부터 허가 취소를 받았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여파도 비껴가지 못했다. ‘의료영리화’ 논쟁을 둘러싼 정치싸움이 계속되는 한 국내에 투자개방형 병원이 문을 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국내 병원 우회투자 논쟁 계속돼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중국 뤼디그룹으로부터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서를 받아 2015년 4월 복지부에 제출했다. 투자개방형 병원 사업을 하려면 복지부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뤼디그룹이 778억원을 투자해 세운 그린랜드헬스케어가 47병상 규모 병원을 짓는 계획서였다. 시민단체들은 반발했다. 병원 사업자인 그린랜드헬스케어가 국내 성형외과 등에 투자했다는 이유로 국내 병원의 우회 진출이라고 문제삼았다. 사업계획서는 반려됐다. 뤼디그룹은 병원 운영 사업자를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로 바꿔 사업계획서를 다시 냈다. 같은해 12월 복지부는 이를 승인했다. “국내 병원의 우회 진출 문제는 모두 해소됐다.” 당시 복지부는 시민단체들의 비판에 이렇게 맞섰다.
정치싸움·사드 사태·정책 뒤집기 발목
병원 설립 계획이 승인됐지만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2017년 사드 사태가 터지면서다. 한국을 찾는 중국인의 발길이 끊기면서 녹지국제병원을 포함한 제주 헬스케어타운 사업 전체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그 사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2017년 7월 우여곡절 끝에 병원이 완공됐지만 시민단체들은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 의료사업 파트너에 국내 성형외과가 포함돼 국내 병원 우회 진출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제주도를 압박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복지부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복지부는 “허가권은 지방자치단체에 있다”며 책임을 미뤘다. 1년 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제주도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개설 불허’를 권고했다. 원 지사는 지난해 말 공론화위원회 결정을 뒤집고 ‘외국인 환자 조건부 개설 허가’를 결정했다. 의료계 관계자는 “공론화위원회 결정 즈음부터 녹지 측은 이미 내부적으로 병원 사업을 못하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권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국내에 투자개방형 병원을 열겠다고 나서겠느냐”고 반문했다.
해외 투자 한 푼도 못 받는 국내 병원들
투자개방형 병원을 세우려는 계획은 여러 차례 있었다. 2005년 송도국제병원 우선협상대상자로 미국 뉴욕프레스비테리안(NYP) 병원이 선정됐지만 법령 미비 등으로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해 2008년 협상이 결렬됐다. 인천시가 2009년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서울대병원과 송도국제병원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었지만 시민단체 등의 반대에 막혀 결국 무산됐다. 시민단체들은 투자개방형 병원이 문을 열면 의료가 민영화돼 국내 보건의료시스템이 무너질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38만 명이다. 2009년 처음 외국인 환자 유치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누적환자가 200만 명을 넘겼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병원들은 외부 투자를 받을 수 없어 환자 서비스 수준을 높이는 투자에 제약이 많다. 해외는 다르다. 독일은 투자배당이 가능한 전문 클리닉을 통해 의료 수준을 높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1990년대 말부터 해외 환자 유치를 위해 투자개방형 병원을 허용했다. 파크웨이병원, 래플스병원 등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의 의료관광객이 몰리면서 한 해 60만 명이 넘는 해외 환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용균 연세대 보건대학원 겸임교수는 “일단 투자개방형 병원을 도입한 뒤 문제점이 있으면 보완하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투자개방형 병원외부 투자를 받고 수익이 나면 자유롭게 배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 국민건강보험공단 대신 민간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진료비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만 세울 수 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