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툭하면 정책감사…규제개혁·혁신성장 꿈도 못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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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특정감사'정부 각 부처가 시행한 정책의 당위성과 적정성 등을 따지는 감사원의 정책감사(특정감사)가 현 정부 들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이 ‘모든 부처와 공기업의 정책을 사후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권한’을 휘두르면서 “규제를 완화하려 해도 감사원이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는 불만이 공무원 사회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 감사 등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작년 123건 역대 최다
공무원들 "규제 풀려고 해도
감사 두려워 못해"
22일 정갑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감사원에서 제출받은 ‘2018 감사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감사원의 특정감사는 123건으로 1년 전(101건)에 비해 21.8% 증가했다. 역대 최고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72건)과 비교하면 2년 동안 70.8% 늘었다. 전체 감사에서 특정감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2016년 52.9%에서 지난해 68.7%로 확대됐다.특정감사는 사회·경제적 현안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감사다. 회계 적정성을 평가하는 재무감사, 정책의 효율성 등을 보는 성과감사와 달리 감사 범위가 사실상 무한정인 탓에 공무원의 ‘적극행정’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평가받고 있다. 4대강 사업, 면세점사업자 선정 등 전 정부 ‘표적 감사’ 논란을 불러온 감사도 특정감사를 통해 진행됐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매일 규제 완화를 외쳐도 현장에서 실행이 안 되는 배경에 특정감사가 있다”며 “공무원들이 특정감사를 의식해 책임질 일을 아예 만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도 “감사원이 최근 적극행정 면책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혔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며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 표적감사를 당할 수 있다는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토로했다.'감사 포비아'에 납작 엎드린 관가…"뒤탈 무서워 규제 못 풀어요"
감사원이 ‘적극 행정 면책 제도’를 도입한 건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이었다.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부르는 ‘원흉’으로 감사원의 과잉 감사가 지목된 데 따른 나름의 해법이었다. 공무원이 소신껏 일하다 실수해도 고의나 중과실이 없을 경우 책임을 묻지 않는 제도가 정착되면 과감한 규제 개혁이 뒤따를 것으로 재계는 기대했다.
그뿐이었다. 공무원의 움츠러든 어깨는 펴지지 않았고, 규제는 오히려 촘촘해졌다. 면책 제도와 별개로 정부 정책의 당위성과 적정성을 사후 잣대로 따지는 ‘정책감사(특정감사)’가 매년 늘어난 여파다. “감사원의 감사 범위 축소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적극 행정’은 나올 수 없다”는 한탄이 공무원 사회에서 나오는 이유다.공무원 옥죄는 특정감사 급증
관가에서는 특정감사에 대해 “감사원이 들고 다니는 ‘도깨비 방망이’”라고 말한다. 감사 대상과 범위에 사실상 제한이 없어서다. ‘사회·경제적 현안에 대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감사’란 점에서 특정감사는 모든 정부 부처와 공기업 등 산하기관의 전체 사안을 들여다보고 손볼 수 있는 수단이다.
회계 적정성 평가(재무감사), 정책의 경제성·효율성·효과성 진단(성과감사) 등으로 감사 범위가 한정된 다른 감사와는 ‘격’이 다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표적 감사’도 대부분 특정감사를 통해 이뤄졌다.감사원은 ‘면책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바로 그해에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KBS) 사장에 대한 감사를 시행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감사원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정 전 사장은 감사 직후 해임됐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책사업이었던 ‘4대강 살리기’와 ‘해외 자원개발’에 대해 대대적인 감사를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무원의 소신 행정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특정감사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실제 감사원의 ‘2018 감사연보’를 보면 지난해 특정감사는 2016년보다 70.8% 늘어났다.
A부처 공무원은 “감사원은 금융당국과 국세청 감사를 통해 금융회사와 민간기업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감사로 과거 정부 정책을 손본 탓에 벌써부터 ‘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을 추진한 공무원들이 떨고 있다’는 얘기가 나돈다”고 말했다.
“감사포비아에 혁신 의지 꺾인다”
전문가들이 모여 추진한 정책에 대해 비전문가가 정책 방향과 절차 등을 광범위하게 재단하는 현행 정책감사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지난 18일 감사원이 발표한 ‘전기요금제도 운영실태 감사 결과’도 이런 경우 중 하나다. 산업통상자원부 담당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 수십 명이 수개월 동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산업용 전기요금 개선 방안’에 대한 해법을 감사원이 제시한 것.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감사원 직원 몇 명이 2주일 동안 살펴보더니 결론까지 제시하더라”며 “비전문가가 낸 결론을 산업부가 따라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감사원 직원은 작년 말 기준 1031명이다. 이들이 감사하는 기관은 6만6315개에 달한다. 한 명당 66개 기관을 담당하는 꼴이다. B부처 공무원은 “감사원이 신이냐”며 “정부 부처와 공기업마다 업무가 다른데 감사원이 모든 정책에 대해 정답을 내놓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특정감사가 공무원의 혁신 의지를 꺾는다는 데 있다. C부처 공무원은 “대다수 공무원은 새로운 정책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감사에 걸릴지를 따진다”며 “‘감사 포비아(감사원 감사에 대한 공포)’로 인해 자기 검열에 빠진 공무원이 많다”고 토로했다.
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규제 개혁이 기대만큼 성과를 못 거두는 배경에도 감사원이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D부처 관계자는 “개인정보 규제 완화가 잘 안 되는 이유도 부처들이 나중에 감사받을 게 두려워 책임을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 감사원은 ‘행정부를 강력히 통제해야 한다’는 1970년대식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며 “정책감사는 성과감사로 일원화해 예산의 효율적 집행 여부 등만 점검하도록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민준/박재원/오상헌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