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공연은 관객의 '콤플렉스' 드러내 깨달음 주는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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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0) 엘렉트라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프로이트가 아니라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이다. 그는 프로이트를 따르는 제자였으나 뒤에 경쟁자가 됐다.엘렉트라 콤플렉스
융은 스위스 시골 교구 목사인 파울 융과 유대인 교수의 딸인 에밀리에 프라이스베르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융의 부모는 종교적인 성향이 달라 행복하지 않았다. 융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외로운 아이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형제로는 여덟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전부였다. 융은 학교에서 외톨이였다. 20세가 되던 해, 융에게 소중한 두 사람이 숨을 거뒀다. 자신의 육체의 아버지인 파울 융과 정신적 아버지 프로이트다. 20세에 가장이 된 융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그는 사촌이자 영매인 헬레네 프라이스베르크의 도움으로 영적인 세계와 그 안으로 진입하려는 강신술에 심취한다. 융은 점차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생겨 취리히의 유명한 정신병원인 부르크휠츨리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한다. 개인 무의식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사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의 조정자가 된 무의식을 말한다.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 오랜 동안의 진화를 거쳐 형성된 ‘인종적인 기억’이다. 인간의 약육강식 본능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여기에 속한다.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야만적인 본능을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힌트를 얻어 발전시켰다.비극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는 자로 폄하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들이 생산한 문학작품, 특히 비극 작품은 도시 안에서 문화와 문명을 구가하는 시민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판단했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아테네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판단했다. 작품은 인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콤플렉스’를 무대 위에 드러냈으며 시민들은 그 적나라한 모습을 관조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들의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과정을 그리스어로 ‘카타르시스’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마음속엔 괴물이 있다. 괴물은 콤플렉스의 이미지다. 그 괴물은 더 이상 나의 방해꾼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찬 미래를 인도해주는 안내자가 된다. 카타르시스는 흔히 ‘정화(淨化)’ 혹은 ‘(몸 안의 불순물) 배설’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 공연의 궁극적인 기능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지만,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했다.학자들은 카타르시스를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리스 비극을 보는 관객이 주인공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해 자신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하는 도덕적 깨달음을 준다. 둘째, 카타르시스는 감정적인 정화이거나 치료다. 비극 주인공에게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 상상이 바로 공포다. 비극 관객이 비극 공연에 몰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그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를 함께 느끼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으로 함께 눈물을 흘린다. 관객은 비극 공연이 끝나면 그 주인공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자신으로 돌아간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월경(月經)’과 관련된 의학용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명 탄생과 연관된 원초적인 단어를 정신적이며 문학적인 은유로 전환시켰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배설해야 할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는 정신적인 ‘목욕재계’가 카타르시스다.
아르고스 도시의 비극
아르고스는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다. 아르고스의 원로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왕 아가멤논을 기다린다. 그는 트로이 원정을 떠난 지 10년 만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르고스에는 그의 귀환을 반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왕비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사촌 동생이자 원수인 아이기스토스를 사귀기 시작해 연인이 됐다.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조상인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를 두려워했다. 정의와 복수의 갈등은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면대결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아가멤논은 모순덩어리다. 그는 아르고스와 그리스를 위해, 정의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소중한, 자신의 분신인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신에게 바친다. 전쟁에서는 수천 명을 거느린 대장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하나뿐인 아내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아내는 그를 죽이려 자신의 정부와 음모를 꾸민다. 아가멤논은 또 전쟁터에서 적의 수를 읽는 전략가지만 10년 만에 아내를 만나러 오면서는 전쟁 포로를 첩으로 데려오는 바보다. 오리엔트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트로이를 함락시켜 수많은 재화를 획득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부를 누릴 수 있는 마음 수련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는 장님이 된 것이다. 아르고스 원로들은 트로이를 함락하고 아르고스를 구원한 아가멤논을 칭찬한다. 그들은 아가멤논을 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로 존경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통해 아가멤논을 알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용맹스러운 동시에 무모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도 아가멤논을 최고 권력자로 묘사하면서 매정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도 부각시킨다.
클리템네스트라
아가멤논과 대결하는 자는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이나 헥토르가 아니다. 10년 만에 돌아온 집에서 자신을 환영할 것이라고 믿은 아내 클리템네스트라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영국 시인 밀턴의 서사시 ‘실락원’에 등장하는 사탄과 같다. 천재적이며 치밀하고 실수가 없으며 거만하다. ‘실락원’의 사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약해지지만 아이스킬로스의 클리템네스트라는 점점 강해져 아가멤논마저 압도하는 영웅이다. 그녀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친 남편에게 복수할 권리를 당당히 갖는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지난 2400년 동안 서양 드라마 역사에서 가장 악마적이면서도 가장 영웅적인 여인이다. 그녀가 상징하는 이중성과 아이러니로 묘하게 매력적이며 감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문자에서 말하는 ‘그’는 현재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인지, 아니면 과거의 사랑인 아가멤논인지 알 수는 없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