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두려움, 경험 그리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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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6
최연호 < 성균관대 의대 학장·소아청소년과 i101016@skku.edu >환자가 병원에 가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두려움이다. 아픈 건 참아볼 수 있겠지만 그냥 놔두었다가 큰 병이 되지 않을까 걱정돼서다. 그러고는 또 두려움의 연속이다. 오늘 만나는 선생님이 잘 보는 분일까? 검사 결과는 빨리 나오려나? 치료하면 바로 나을까? 끝이 없다.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을 모아 고충지도(hassle map)를 만들고 이것을 모두 해결해줄 수 있다면 그 병원의 고객만족도가 최고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의료진이 해결할 수 없는 환자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대장내시경을 수면마취 없이 하면 그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비수면 대장내시경을 두 개 군으로 나눠 시행하며 1분마다 고통 정도를 점수화했다. 한 군은 내시경 시작 후 8분이 지나 가장 통증이 심할 때 바로 내시경을 중지했다. 다른 군은 24분이 지나 고통이 다 사라진 뒤 내시경을 정상적으로 종료했다. 그러고는 두 군에게 한 번 더 대장내시경을 받아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어느 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많았을까? 고통의 시간이 두 번째 군에서 더 길어 싫어했을 것 같지만 특이하게도 이 군에서 호응이 많았다.사람은 늘 어떤 상황을 경험하는데, 나중에 그 상황을 떠올릴 때는 피크(peak)와 엔드(end)만 기억한다고 카너먼은 설명한다. 대장내시경을 하며 겪은 ‘총 고통의 양’은 시간이 오래 걸린 두 번째 군이 컸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통의 총 지속시간은 무시하며(duration neglect), 피크와 엔드만으로 판단해 내시경 시술 마지막에 아프지 않았던 두 번째 군이 고통이 적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는 행복했는데, 공연 마지막에 객석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면 나의 기억자아(remembering self)는 그 공연이 망쳤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환자가 진료를 받은 뒤 의료진과 병원을 평가하는 것은 결국 이들 기억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비단 병원에서만 일어나는 걸까? 내 가족에게서, 학교에서, 현장에서 우리는 늘 ‘피크-엔드 법칙’, 그리고 지속시간 무시 현상과 마주친다. 우리는 경험을 중시한다지만 결국 기억으로 국한하는 묘한 경향이 있다. 그러고는 나쁜 기억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두려움에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의사 결정의 핵심이 사람의 일부 기억, 어쩌면 왜곡됐을지도 모를 기억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두렵기까지 하다. 좋은 경험과 좋은 기억은 그래서 더욱 우리 곁에 가깝게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