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BTS 때문에 융 읽어요"…서점가에 때 아닌 인문학 바람

윤정현 기자의 독서공감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음반매장에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미니앨범 ‘맵 오브 더 솔: 페르소나’가 진열돼 있다. /한경DB
올 1월 출간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가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면서 ‘철학’을 제목에 붙인 신간이 심심찮게 보인다. 예상치 않았던 돌풍에 인문 분야에 ‘철학서 바람’이 불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책을 쓴 야마구치 슈는 컨설팅회사 콘페리헤이그룹에서 일하는 컨설턴트다. 조직 개발, 혁신, 인재 육성, 리더십 분야의 전문가로 일본 광고회사 덴쓰,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도 일했다. 게이오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철학사상과 개념을 가져와 경영 현장에 접목해 설명한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이 뒤섞인 감정을 의미하는 니체의 ‘르상티망’이란 개념을 통해 ‘타인의 시기심을 관찰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인다’는 의미를 풀어내는 식이다. 이 책의 국내 주요 독자층은 30~40대 남성이다. 20~30대 여성층이 베스트셀러를 결정해온 근래 독서시장에서 이례적인 현상이다. 철학에서라도 각박한 현실 속 ‘삶의 무기’를 찾으려는 절실함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뿐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리언 페스팅어의 ‘인지 부조화’, 융의 ‘페르소나’ 등을 경영 전략과 현실에 접목한다.‘페르소나(persona)’는 최근 방탄소년단이 내놓은 새 앨범의 부제기도 하다. ‘외적 인격’ ‘가면을 쓴 인격’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는 ‘얼굴’ ‘가면’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프로소폰(prosopon)’에서 유래했다. 방탄소년단은 “페르소나는 사회적 자아를 의미한다”며 “부정적인 의미의 ‘겉껍데기’이기만 한 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심리학자 머리 스타인이 융의 이론에 대해 쓴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 새 앨범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했다. 그 덕분에 2015년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뒤 베스트셀러 순위권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이 ‘쉽지 않은 책’이 지난달 인문 분야에서 10위권까지 올라갔다. 온라인 서점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코너엔 어느새 ‘BTS(방탄소년단) 새 앨범에 영감을 준 책’이라는 수식이 친절하게 붙어 있다. ‘어려워서 읽다 만 책을 BTS 때문에 다시 본다’ ‘BTS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다’ 등 온라인 교보문고에 올라온 이 책의 리뷰 53건 대부분이 최근에 작성됐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저 책과 철학,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괜히 반갑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철학의 힘》에서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고 했다. 철학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학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김 교수는 답한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우리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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