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시장경제 배신하는 '보은·배은 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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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지연에 좌우되는 사외이사·감사위원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첫 작품이자 출세작인 《유년시절》에는 사실감 넘치는 아동심리와 예술성이 녹아 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대지주 집안에서 가정교사가 주도하는 자녀교육이 이채롭다. 가정교사는 “모든 악덕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노트 받아쓰기를 통해 강조한다. 권력자에 대한 보은(報恩)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켜세우는 봉건질서가 또렷하다.
경영감시보다 보은성 회사 편들기 많을 뿐
본연의 임무 충실토록 법적 책임 강화해야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
보은과 배은의 말다툼이 가장 치열한 동네는 정치권이다. 집권 초기에는 보은 잔치로 흥청거리지만,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 불만이 싹트고 정권이 바뀌면 배은망덕을 따지는 과거사 들추기가 어김없이 재연된다. 가장 적합한 인사를 선임하는 것은 공직자 본연의 책무다. 배은을 따지는 것은 애당초 공정하지 못한 인사였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사항이 없는지 따질 일이다.회사 임원과 관련된 보은·배은 논란은 더욱 저급하다. 주식회사는 주주의 유한책임을 보장하는 대신 이사회가 경영을 맡는 제도다.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가 대표이사를 선임하고 업무를 집행한다. 과반수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법령이나 정관에 특별한 제한이 없으면 이사 선임을 독점한다. 경영능력을 갖춘 상임이사를 선임해야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유능한 경영진 선정은 재산을 지키는 본능이다.
그러나 경영감시가 주된 업무인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의 경우는 생각이 달라진다. 회계와 재무 및 상사법 전문성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학연·지연 및 로비 능력 쪽으로 흘러간다.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한 사외이사·감사위원의 부실한 통제는 화근으로 돌변한다. 충격적 파생상품 거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233년 전통의 베어링은행을 파산시킨 1995년 선물(先物)거래 파동은 하급직원인 닉 리슨의 독단을 내부통제를 통해 걸러내지 못한 결과다.
필자는 ‘카드대란’이 발생한 2003년 LG카드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을 맡았다. 무분별한 카드발급과 정부의 추심규제 강화가 맞물려 대금 연체가 급증했다. 오랫동안 카드채를 인수하던 은행이 신규 인수뿐만 아니라 차환도 거절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다. 개인별 카드사용 한도만 계속 늘려주면 대손실적이 제대로 계상되지 않는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연체로 진입하는 비율’에 따라 대손충당금을 설정하도록 바꾸고 감시를 강화했다. 외국계 금융회사가 파생상품 성격이 가미된 자금공급을 제안했고 회사는 위험을 감수하고 받아들였다. 매주 여러 건의 파생상품 거래가 이사회에 부의됐고 거래구조를 파악하고 숨은 위험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다. 밤새워 검토한 날도 많았다. LG그룹이 LG투자증권을 끼워 LG카드를 채권단에 넘겼고 결국은 신한카드로 승계됐다.소요자금과 경영을 책임지는 주체(A)와 기술력을 보유한 주체(B)의 공동사업에서 발생한 파생상품 회계문제가 복잡하다. B의 기술력을 유인하기 위해 A는 B에게 투입 원가에 약간의 이자율을 가산한 약정금액을 기준으로 주식을 매수할 권리를 부여하는 옵션계약을 맺었다. 기업가치가 올라가면 B의 행사가능성이 높아지고 주식을 시가보다 낮은 약정가격에 넘겨줄 A의 의무가 현실화된다. 옵션계약 당시는 행사가능성이 낮아 A가 책임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공동사업 성과가 확대되면서 옵션 행사가능성이 높아져 A의 부채가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공동사업 가치 증대에 따른 이익도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공동사업자가 이익을 공유하는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이런 옵션은 재무제표 주석 등으로 적절히 공시해야 할 사항이다.
옵션계약 체결뿐만 아니라 공시도 이사회와 감사위원회가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공시 시기와 방법’을 이사회 의안 표지에 명기하는 회사도 있다. 내부통제 강화를 제안하면 회사 편을 들고 나서면서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며 비판하는 사외이사가 있다. 이런 유형의 저급한 보은이 회사를 위기에 빠뜨린다. 사외이사·감사위원이 전문성·독립성을 가지고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도록 법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주권의 민주국가와 유한책임이 전제된 주식회사 중심의 시장경제를 배신하는 ‘보은·배은 적폐’는 속히 청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