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호의 디지털 프런티어] '가상 오피스'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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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10여 년 전 가상의 인터넷 공간인 ‘세컨드 라이프’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자신의 아바타로 사이트에 접속하면 가공의 공간에서 다른 아바타들을 만나고 각종 놀이를 즐기는 플랫폼이다. 하지만 세컨드 라이프는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성이 없었고 모바일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이런 가상 공간을 경영에 도입한 기업이 있다. eXp라는 미국의 부동산 회사다. 이 기업에서 일하는 부동산 직원(계약제 중개인 포함) 1만8000여 명의 사무실은 따로 없다. 모두 자신의 아바타로 가상 오피스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워싱턴주 벨링햄이라는 조그만 도시에 본사가 있지만 경영진 모두 자기 집에서 일한다. 굳이 모이지 않아도 된다. 회의는 언제든지 가상 오피스에서 자신의 아바타로 진행한다. 마이크를 통해 대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제삼자가 들을 수 없는 장치도 갖춰져 있다.
eXp는 사무실 임차료뿐만 아니라 사무실 사용에 따른 어떤 비용도 들지 않는다. 직원들의 교통비도 필요 없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직원들과 부동산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하다 보니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중개인들은 수익을 주식으로 받을 수 있다. 비용이 절감되고 생산성은 올라간다. 기업 실적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세 배 증가한 5억달러 규모다. 2013년 공개한 주식은 6년 사이에 열 배나 뛰었다. 미국 뉴욕에서 지난 1년간 주요 부동산 회사 두 곳이 폐업한 것과 비교된다. 이들 두 곳은 사무실 임대료 급등으로 사업 채산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eXp는 2009년 글렌 샌퍼드가 설립한 기업이다. 2008년 부동산 기업의 부실 채권이 낳은 금융위기를 목격하고 사무실 비용을 줄이고자 인터넷 공간에 오피스를 마련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히키라는 콘텐츠 제작사는 2018년 5월부터 가상현실(VR) 사무실을 마련했다. 직원들은 자택에서 VR 기기를 장착하고 버튼 하나로 출퇴근한다. 한국에서도 5세대(5G)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SK텔레콤 등 통신업체들이 스마트 사무실을 선보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벌써 일부에서는 가상 공간 기업이 기존 사업을 파괴할 태세라고 한다. 더구나 5G가 도입된 마당이다. ‘사무실 없는 사무실’ 시대가 본격 열릴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왕래도 대폭 줄어들지는 않을지.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