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목의 선전狂시대] '82년생 김지영' 읽는 中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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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부터 판매..."상황 비슷" 공감 얻어올해 초부터 중국 선전의 대형 서점에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판매되고 있다. 정확한 판매량은 집계되지 않고 있지만 메인 판매대에 수개월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실적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따로 서가까지 마련된 일본에 비해 한국 현대소설은 중국 서점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 더 반갑다.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은 한류가 마케팅 포인트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 ‘국민 MC 유재석’, 방탄소년단, 레드벨벳 등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광고 문구가 띠지에 적혔다. 하지만 양성평등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한 이 책을 중국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일찍부터 맞벌이와 여성의 사회진출이 일상화 됐고 그만큼 여성들의 목소리가 큰 중국에서 결혼 후 사회적 기회 상실과 ‘독박 육아’ 등의 문제를 다룬 <82년생 김지영>은 크게 와닿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온라인 책 판매·평가 사이트 도우반에는 15개의 후기가 올라왔다. 양성평등 면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낙후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둥밍주 거리 대표 등 활발한 사회 진출에도
남아선호 등 중국 내 양성차별 여전
아이디 라오루이는 “남성들의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묘사된 것 같은데 한국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니 놀랍다. 이런 남성들이 서울과 같이 현대화된 도시에 존재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를 접하며 느꼈던 한국 여성의 낮은 지위를 다시 확인했다.”
아이디 진은 “한국 드라마에서 시어머니가 ‘어디 하늘같은 남편을 때리나’라고 해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한국 여성의 삶 이면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역시 “같은 아시아 여성으로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아이디 이샤는 “출산과 그에 따른 부담은 왜 여성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가. 왜 남편들은 자신의 일이기도 한 육아를 ‘돕는다’고만 표현할까. 시대가 지나면 달라질까. 92년생 김지영, 02년생 김지영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아이디 셔토우는 “중국 남성들이 가사노동을 더 많이 하기는 하지만 동아시아 3국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느꼈다. 육아 등 결혼 이후의 부담이 온전히 여성에게 지워지며 사회적 성취가 어려워지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법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국과 일본에 비해 중국은 부족한 점도 많다. 결국 50보, 100보다.”“최소한 한국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여권이 높아지는 것과 비슷 한 흐름인 것 같다”는 평가도 있었다.
표면적으로 중국의 여권은 한국보다 높아 보인다. 기자가 베이징에서 3개월간 머물던 2012년 중국인 하숙집에서 음식과 설겆이는 남편, 집안 청소는 파출부의 몫이었다. 왜 아내는 가사노동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50대 집주인은 “여성의 몸은 남자보다 약하기 때문에 맞벌이하는 가정에서 남편이 가사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래서인지 직장 내에서 높은 성취를 일군 여성을 마주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미중 무역전쟁을 계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 기업 하이얼. 창업자 런정페이가 이 회사의 얼굴이지만 실제 이사회 회장은 여성인 순야팡이 1999년부터 2018년까지 20년 가까이 맡았다. 화웨이의 최고 관리자 13명 중에는 순야팡을 비롯한 여성 3명이 포함됐다.중국 2대 가전업체 거리의 둥밍주 대표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CEO 중 하나다. 남편과 사별한 뒤 생계를 위해 영업직 말단사원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해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회사 경영 과정에서 신뢰와 결단력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그의 개인 브랜드 가치는 거리라는 기업 전체에 필적할 수준이다.
중국은 강간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을에도 100여명의 강간범이 처형됐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몇 가지 단서가 붙는다. 여러 차례 재범을 했거나 피해자의 정신과 육체에 영구적인 장애를 초래했을 때다. 내년 출소를 앞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조두순씨도 중국이었다면 사형을 언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뒤떨어진 점도 적지 않다.
강간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보이지만 성추행에 대한 인식은 낮다. 한 중국 대학생은 “버스나 지하철이 붐비는만큼 성추행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지만 경찰에 신고해도 가해자는 대부분 훈방된다”며 “직접적인 증거가 잘 남지 않는 성범죄는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전했다.
성 상품화도 거리낌 없이 행해진다. 여성들이 고위직에 진출한 화웨이에는 영어를 잘 하는 미모의 여성 직원들로 채워진 ‘리셉셔니스트’라는 보직이 따로 있다. 화웨이 본사 등을 방문한 외국 손님들을 맞아주는 역할이다. 건물 및 시설에 대한 간단할 설명을 하지만 회사 사업 등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이라 서구 기업의 홍보팀 직원과는 명확히 다르다. 같이 회사 캠퍼스를 걷고 식사를 하며 화웨이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이들의 역할로 보인다. 중국 기업들과 자주 교류하는 한 사업가는 “중국 기업측과 저녁 식사를 하면 아름다운 여직원을 동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사업 자체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 식사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된다”고 전했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은 “돈 많은 남자 만나도록 노력해라” “여자들은 결혼 어떻게 하느냐가 팔자를 좌우한다”는 말도 흔하게 듣는다. 업무나 취미생활을 위해 개설된 모바일 채팅방에서도 이같은 말이 흔하게 나온다.
올해 3월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가족드라마 ‘도우팅하오(都挺好)’의 주제도 이같은 모순이었다. 드라마 속 어머니는 아버지를 쥐락펴락하며 가족 내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갖고 있지만 두 아들의 사회적 성공을 전폭 지지하면서 막내인 딸은 “여자가 교육을 많이 받아 뭐하나”며 홀대한다.
남아선호도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한 중국인 지인은 “아들을 얻기 위해 수정란 중 남아를 골라 잉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닌 해외 병원을 알아둔 상황”이라며 “한국돈으로는 수천만원이 들지만 꼭 아들을 낳고 싶다”고 말했다.이처럼 뿌리깊은 관념의 벽을 넘는 것은 적극적인 사회 진출과 또다른 문제다. 중국 여성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이 사랑 받는 이유로 분석된다.
선전=노경목 특파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