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한반도는 지금] 김정은은 어떻게 '김정남 암살' 면죄부를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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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파 신문인 산케이에서 ‘김정남 암살’의 배후를 짐작할 만한 보도가 15일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살해 직전에 ‘자유조선’의 리더인 에이드리언 홍 창을 만났고, 망명 정부 수반을 제안받았다는 내용이다. 홍 창은 하노이에서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이던 2월에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을 습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로, 미국 사법당국의 지명 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다.
김정남과 홍 창의 접촉설은 지난 3월 워싱턴포스트(WP)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국가정보원 출신 김정봉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보비서관을 인용한 기사였다. WP와 산케이에 따르면 김정남은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로 자유조선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정남이 자유조선 리더를 만난 것과 2017년 말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당한 것과의 인과 관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남 암살 당시 말레이시아 사법 당국이 북한 남성 4명을 용의자로 지목한 점에 비춰볼 때 김정남은 ‘김정은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책임자는 지난해 1월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정남이 2017년 2월9일 휴양지인 랑카위의 한 호텔에서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고 증언했다. 이 인물에 관해선 CIA(미 국가정보원)이란 설이 유력하다.
김정남 암살의 유력 용의자로 구금돼 있던 베트남, 인도네시아 출신의 여성 2명이 무혐의 결론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는 점도 ‘북한 배후설’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들은 VX 신경작용제를 손으로 발라 결과적으로 김정남을 독살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줄곧 몰래 카메라인 줄 알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이유로 유력 언론들은 그들이 북한 공작원들의 희생양일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실제로 북한 공작원들은 유명세를 갈망하다 한 순간에 살인범으로 몰린 20대 여성들을 미끼 삼아 유유히 말레이시아를 빠져 나갔다.
말레이시아 정부를 비롯해 자국민이 관여된 베트남, 인도네시아 정부 모두 사건 초기엔 북한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는 듯 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독살 혐의를 받은 두 여성을 ‘훈련된 암살자들’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베트남 정부도 북한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양국 관계는 단교 직전으로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달 초 베트남 여성까지 석방함으로써 ‘김정남 암살’ 사건을 종료시켰다. 백주대낮에 국제공항에서 한 남성이 독살당했지만, 사건은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됐다.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도 2차 미·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복원됐다. 김정은은 사실상 ‘김정남 암살’의 배후자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셈이다.아세안의 대표 3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왜 이번 사건에 침묵하는 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밝혀질 것이다. 현 단계에선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이들 3국이 한국과 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아세안은 오랫동안 비동맹외교를 표방해왔다. 미국과 중국 등 세계 패권 국가들의 다툼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런 공식은 한반도 외교에도 적용됐다. 한때 1990년대까지만해도 싱가포르 외교가에선 북한의 힘이 우리를 능가한다는 말들이 많았다.
아세안의 한반도 등거리 외교는 2008년 ARF(아세안지역포럼) 총회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 해 11월에 북한군은 금강산 관광객을 피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사회는 일제히 북한을 규탄했다. 하지만 아세안만 예외였다. 당시 우리 외교부와 통일부는 ARF에서 아세안 국가들이 북한 비난 성명을 내길 바랬다. 관료들은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아세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끝까지 비난성명을 내지 않았다.
‘김정남 암살’이란 희대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아세안과 북한을 다시 이어주는 끈이 돼 버렸다. 인권 탄압과 핵무력 증강을 이유로 북한을 비난하던 아세안 각국은 올해를 기점으로 친북(親北)으로 돌아섰다. 김정은 체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등한 지위에서 핵협상을 벌인 김정은을 아세안 각국은 정식 리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이 대목에서 한번 짚어봐야할 게 있다. 우리 정부의 신남방정책이 ‘김정남 암살’을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도록 하는데 한몫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신남방, 신북방정책의 핵심은 개방된 북한을 매개로 새로운 경제권역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이는 달리 말해 북한을 고립의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donghuip@hankyung.com
김정남과 홍 창의 접촉설은 지난 3월 워싱턴포스트(WP)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국가정보원 출신 김정봉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보비서관을 인용한 기사였다. WP와 산케이에 따르면 김정남은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로 자유조선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정남이 자유조선 리더를 만난 것과 2017년 말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당한 것과의 인과 관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남 암살 당시 말레이시아 사법 당국이 북한 남성 4명을 용의자로 지목한 점에 비춰볼 때 김정남은 ‘김정은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책임자는 지난해 1월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정남이 2017년 2월9일 휴양지인 랑카위의 한 호텔에서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고 증언했다. 이 인물에 관해선 CIA(미 국가정보원)이란 설이 유력하다.
김정남 암살의 유력 용의자로 구금돼 있던 베트남, 인도네시아 출신의 여성 2명이 무혐의 결론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는 점도 ‘북한 배후설’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들은 VX 신경작용제를 손으로 발라 결과적으로 김정남을 독살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줄곧 몰래 카메라인 줄 알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이유로 유력 언론들은 그들이 북한 공작원들의 희생양일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실제로 북한 공작원들은 유명세를 갈망하다 한 순간에 살인범으로 몰린 20대 여성들을 미끼 삼아 유유히 말레이시아를 빠져 나갔다.
말레이시아 정부를 비롯해 자국민이 관여된 베트남, 인도네시아 정부 모두 사건 초기엔 북한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는 듯 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독살 혐의를 받은 두 여성을 ‘훈련된 암살자들’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베트남 정부도 북한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양국 관계는 단교 직전으로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달 초 베트남 여성까지 석방함으로써 ‘김정남 암살’ 사건을 종료시켰다. 백주대낮에 국제공항에서 한 남성이 독살당했지만, 사건은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됐다.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도 2차 미·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복원됐다. 김정은은 사실상 ‘김정남 암살’의 배후자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셈이다.아세안의 대표 3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왜 이번 사건에 침묵하는 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밝혀질 것이다. 현 단계에선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이들 3국이 한국과 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아세안은 오랫동안 비동맹외교를 표방해왔다. 미국과 중국 등 세계 패권 국가들의 다툼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런 공식은 한반도 외교에도 적용됐다. 한때 1990년대까지만해도 싱가포르 외교가에선 북한의 힘이 우리를 능가한다는 말들이 많았다.
아세안의 한반도 등거리 외교는 2008년 ARF(아세안지역포럼) 총회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 해 11월에 북한군은 금강산 관광객을 피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사회는 일제히 북한을 규탄했다. 하지만 아세안만 예외였다. 당시 우리 외교부와 통일부는 ARF에서 아세안 국가들이 북한 비난 성명을 내길 바랬다. 관료들은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아세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끝까지 비난성명을 내지 않았다.
‘김정남 암살’이란 희대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아세안과 북한을 다시 이어주는 끈이 돼 버렸다. 인권 탄압과 핵무력 증강을 이유로 북한을 비난하던 아세안 각국은 올해를 기점으로 친북(親北)으로 돌아섰다. 김정은 체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등한 지위에서 핵협상을 벌인 김정은을 아세안 각국은 정식 리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이 대목에서 한번 짚어봐야할 게 있다. 우리 정부의 신남방정책이 ‘김정남 암살’을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도록 하는데 한몫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신남방, 신북방정책의 핵심은 개방된 북한을 매개로 새로운 경제권역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이는 달리 말해 북한을 고립의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