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버블 붕괴'와 함께 무너진 신뢰…코스닥 '20년 침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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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비이성적 과열이 자산가치를 지나치게 밀어올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22) 2000년 닷컴버블의 붕괴
미국 나스닥지수가 1300을 돌파하며 파죽지세로 오르던 1996년 12월 5일. 앨런 그린스펀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미국기업연구소(AEI) 연설에서 유명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다.주식시장의 거품을 겨냥한 이날 연설은 “과거 일본이 겪은 10년처럼 장기 침체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와 함께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쿄 주식시장이 곧바로 3.2% 떨어져 마감했고, 이후 개장한 다른 시장도 연이어 급락 출발했다.
주춤하던 기술주는 그러나 다시 가속 페달을 밟으며 3년여를 더 내달렸다. 그리고 1999년 거대한 비이성적 과열이 한국의 벤처기업들을 에워쌌을 때, 그린스펀의 의문처럼 우리는 파괴적인 ‘닷컴 버블’이 가져올 코스닥시장의 미래를 알지 못했다.
낙관론의 확산새 천년(new millennium)을 앞둔 1990년대 말 세계는 첨단기술이 이끌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을 때, 인류는 마침내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미국 경기는 인터넷, PC 보급에 따른 노동생산성 혁명으로 최장기(1991~2001년) 호황을 만끽하며 막연한 낙관론을 증폭했다.주식 투자자들은 인류가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신경제(new economy)’의 지평을 연 첨단기술에 열광했다. 미국의 PC 소유 가정은 1990년 전체의 15%에서 2000년 51%로 불어났고, 인터넷은 정보 격차 해소와 가상(cyber) 공간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아마존과 아메리카온라인(AOL), 야후! 등이 내놓은 미래의 눈부신 사업 모델을 접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문가와 미디어는 기업가치를 과거의 이익으로 평가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정보기술(IT) 신대륙을 향한 ‘골드러시’를 자극했다.
나스닥의 비이성적 낙관론은 전 세계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외환위기 여파로 신음하던 한국에서조차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출발은 한 인터넷광고 벤처업체의 폭발적인 주가 상승이었다.버블의 상륙“조작이 아니면 어떻게 가능합니까!”
1999년 봄 코스닥시장에선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즈(골드뱅크)란 회사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당시 30세이던 김진호 사장이 창업한 이 회사는 ‘인터넷으로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독특한 사업 모델로 투자자를 모으며 그해 2월 초까지 15일 연속 상한가를 달렸다. 이후 몸값이 4000억원까지 치솟자 불똥은 정치권으로 튀었다. 10월 국정감사장에선 여야 의원이 “주가가 상장 후 1년 만에 50배까지 뛰어오르도록 조작한 배후를 밝혀내라”며 금융감독위원회를 몰아붙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골드뱅크 논란은 그러나 새롬기술(현 솔본)이라는 회사의 등장과 더불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료 인터넷 전화’ 사업을 내세운 새롬기술은 1999년 8월 상장 6개월 만에 무려 150배 가까이 폭등해 단숨에 코스닥 황제주로 자리잡았다. 이듬해 2월에는 시가총액이 약 3조원까지 불어나 현대자동차마저 눌렀다.
벤처 열풍을 향한 의심은 경외로, 그리고 확신으로 변해갔다. 소프트웨어업체 한글과컴퓨터(창업자 이찬진), 국내 최대 포털 다음커뮤니케이션(이재웅)이 수개월 만에 수십 배 오르는 주가 상승세에 동참했다.
새로운 ‘벼락부자’를 꿈꾸는 벤처기업인의 창업도 쏟아졌다. 삼성SDS 사내벤처로 1997년 출범한 검색서비스업체 네이버컴(이해진)은 1999년 6월 독립법인으로 새출발했다. 1998년 한게임커뮤니케이션(김범수)이란 회사가 등장했고, 당시 ‘리니지’란 게임으로 관심을 모은 게임업체 엔씨소프트(김택진)도 코스닥 상장 채비를 서둘렀다. 1998년 말 2000개 수준이던 벤처기업은 2001년 1만 개를 돌파했다.
코스닥의 즐거운 비명
“아직도 거래소 주식 투자하세요?”
출범 세 돌을 맞은 1999년의 코스닥시장은 펄펄 끓어올랐다. 새해 764로 출발한 코스닥지수(1996년 7월 1일=1000)는 6개월 만에 2000선을 돌파했다. 모 영화배우가 새롬기술에 투자해 100억원대 평가차익을 올렸다는 등 ‘대박’ 소문이 퍼지면서 돈 버는 시장으로서 코스닥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다. 거래대금은 1999년 11월 26일 하루 2조원을 뛰어넘더니 2000년 2월에는 거래소시장(현 유가증권시장)마저 추월했다. 주문 폭주로 인한 전산 마비로 매매 체결이 한두 시간씩 늦어지는 사태가 속출했다.
코스닥은 본래 1987년 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가 문을 연 장외 중소·벤처기업 주식시장이었다. 1996년부터 코스닥이란 이름을 달고 거래소처럼 경쟁매매를 도입했지만 1998년까지만 해도 하루 거래대금이 수십억원에 불과했다.
신규 상장보다 퇴출이 많았던 기업공개(IPO) 시장도 180도 변했다. 1999년 5월 정부가 코스닥 등록기업의 법인세를 5년간 절반으로 감면해주는 조치를 발표하면서 신규 등록(상장)기업은 그해 104곳으로 폭증했다. 직전연도 상장사는 8곳이었다. 거래소 상장 자격을 갖춘 매일유업(현 매일홀딩스) 등도 1999년 코스닥행을 택했다.
붕괴의 전조
코스닥시장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폰지(다단계 사기) 형태로 불러들였고 ‘묻지마’ 투기장으로 변해갔다.
다수의 벤처기업은 높은 주가를 이용해 주식을 마구잡이로 찍어낸 뒤 투자자의 돈으로 새로운 회사를 인수했다. 주가가 너무 비싸지면 주식을 쪼개거나(액면분할), 더 많이 찍어 공짜로 나눠주는(무상증자) 방식으로 다시 싸 보이게 만들었다. 기업 이름에 ‘닷컴’ 또는 ‘인터넷’을 넣는 사명 변경도 급증했다.
유상증자도 끊이지 않았다. 1999년 전체 상장사 네 곳 중 한 곳에 해당하는 108개사가 기존 주주와 일반에 새 주식을 찍어 팔았다. 주식 관련 사채(ELB)도 남발했다. 골드뱅크는 코스닥 등록 직후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전환사채(CB)를 발행했다.
코스닥 기업이 1999년 한 해 신규 상장과 유상증자로 흡수한 돈은 모두 5조7000억원에 달했다. 곳간이 두둑해진 기업인들은 주식(스톡옵션) 등으로 후한 급여를 지급했다. 강남 테헤란밸리 유흥주점은 벤처기업인의 이른바 ‘닷컴 파티’로 불야성을 이뤘다.
드러난 실체
2000년 새해가 밝자 투자자들은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도의 앞자릿수가 바뀌면 컴퓨터 인식오류가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Y2K 대란’도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여전히 대다수 닷컴 기업이 적자였고, 주가를 떠받칠 연료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실대던 코스닥지수는 2000년 2월 7일 사상 최대폭(10.0%)으로 급등하며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운 뒤 다음달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0년 4월 17일에는 11.4% 폭락하며 고통스러운 버블 붕괴의 ‘신호탄’을 쐈다.
뒤늦게 각국 중앙은행까지 거품 진화에 뛰어들면서 패닉 장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Fed는 1999년 6월 기준금리를 연 5%로 0.25%포인트 올린 것을 시작으로 1년에 걸쳐 6.5%까지 인상했다.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2000년 10월 연 5.25%까지 올렸다.
거품이 걷히면서 일부 벤처기업인의 추악한 실체도 속속 드러났다. 정현준·진승현·이용호 사건으로 불리는 이른바 ‘3대 게이트’가 2000년 10월부터 연달아 터져나왔다. 계열 금융회사를 동원해 불법 대출을 받고 주가조작에 가담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들은 비리를 감추려 정·관계에 뇌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거품의 유산
나스닥은 2002년 1300선이 무너지면서 결국 그린스펀이 비이성적 과열을 경고한 1996년 12월보다 낮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코스닥지수는 2000년 말 525로, 같은 해 3월의 사상 최고(2834) 대비 81.5% 떨어져 거래를 마감했다. 새롬기술 주가는 그해 고점 대비 50분의 1로 추락했고, 골드뱅크는 2009년 상장폐지됐다.
닷컴버블의 붕괴와 기업인의 각종 횡령·배임에 따른 충격은 코스닥시장을 긴 침체의 터널로 밀어넣었다. 2001년 다소 반등했던 코스닥지수는 2002년 말 다시 443까지 추락했다. 코스닥에 상장했던 엔씨소프트, 아시아나항공, 교보증권 등은 ‘부실기업 낙인 효과’를 우려해 유가증권시장으로 이사했다.정부와 거래소는 이후에도 수많은 코스닥시장 신뢰 개선 방안을 쏟아냈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코스닥은 기준지수(1000)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후신인 카카오가, 2018년에는 코스닥 대장주인 셀트리온이 유가증권시장으로 둥지를 옮겼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