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유통사들은 선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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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필 생활경제부 기자 jp@hankyung.com‘쇼핑몰 지어달라, 사람 좀 입사시켜달라, 지역사회에 뭔가 좀 보탬이 될 일을 하라.’
4년 전 국회의원 총선거 때 유통업체들은 정치권에서 이런 민원을 받았다. 국회의원들이 국가 예산을 끌어와 지역에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놓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기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다음 선거에 대비해 지역구 유권자에게 의정활동 성과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 때마침 ‘갑을관계’가 사회적 이슈가 되자 유통회사들은 타깃이 됐다.다시 총선이 10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유통회사 관계자들은 “이번엔 어떤 요구를 할지 두렵다”고 했다. 유통업체들은 전국에 백화점·마트·아울렛 등을 운영하고 있어 다양한 요구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 관계자는 “특히 지방은 대규모 쇼핑시설이 한두 곳에 불과하고, 지역주민 삶과 직접적 연관이 있어 민원의 표적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미 시작된 듯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요즘 지역에 사회공헌 활동을 해달라는 요구를 자주 받는다”고 전했다. 최근 KT가 채용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자 정치인들이 인사청탁을 자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인접한 전통시장이 있으면 ‘골목상권 침해’ 이슈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물질적 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많다. 한 유통업체가 다른 지역의 쇼핑센터에 장난감 도서관, 실내 놀이터 등을 설치해 좋은 반응을 얻으면 ‘우리 지역구에도 똑같이 설치해달라’는 식이다. 증명사진은 필수다. 기업들은 사회공헌 성격이 있는 시설을 지역에 설치하면 지역구 의원을 꼭 초청한다. 다음 선거 홍보에 사용할 수 있게 기념촬영하도록 ‘배려’하는 셈이다. 의원들이 기여한 일이 없어도 그렇다.
요구가 황당한 수준일 때도 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인구가 1만여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딸린 대형마트를 세워달라는 요구도 있었다”며 “사업성이 전혀 없는 곳에 입점을 요구해 곤란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선진국들은 다양한 인센티브를 동원해 기업을 유치하지만, 국내 일부 정치인은 여전히 권력과 압력을 동원하고 있다. 내수침체에 따른 실적 악화에 시달리는 유통사 경영자들은 다가오는 총선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