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철저한 자기반성…'경제 기적' 바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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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위기(危機)’라는 말에 위험과 기회가 내포돼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자로도 그렇지만 영어 ‘crisis’도 비슷하다. 그 어원인 그리스어 명사 ‘krisis’와 동사 ‘krino’는 ‘분리하다’ ‘결정하다’ ‘구분하다’ ‘전환점’을 뜻한다. 위기란 중대한 고비 혹은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얘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강주헌 옮김 / 김영사
600쪽 / 2만4800원
《총, 균, 쇠》 《문명의 붕괴》 《어제까지의 세계》 등의 역작으로 잘 알려진 재레드 다이아몬드 미국 UCLA 교수(82)가 국가적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미래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역작을 내놨다. 영어판과 한국어판으로 동시 출간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다. 전작에서 인류사와 문명사의 거대 담론을 펼친 저자는 이번 책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저자에 따르면 위기는 “일반적인 대처법과 문제 해결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다.
그러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안팎의 변화 압력에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위기치료사들이 개인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찾아낸 열두 가지 요인을 국가적 위기 진단과 대처를 위한 분석틀로 제안한다. 그 열두 가지는 ①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②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책임의 수용 ③해결해야 할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울타리 세우기 ④다른 국가의 물질적·경제적 지원 ⑤다른 국가의 문제 해결 사례 ⑥국가의 정체성 ⑦정직한 자기평가 ⑧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위기 ⑨인내 ⑩ 유연한 대처 ⑪국가의 핵심가치 ⑫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저자는 이런 기준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선택적 변화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낸 7개국에 대입해 꼼꼼하게 분석한다. 그 나라는 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이다.먼저 북유럽의 강소국 핀란드를 보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 러시아에서 독립했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라 한순간도 러시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국경을 뒤로 물리고 핀란드 영토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게 해달라는 소련의 요구를 거부한 끝에 1939년 11월 양국 간 ‘겨울전쟁’이 터졌다. 당시 인구 370만 명의 핀란드는 인구 1억7000만 명의 소련과 맞붙어 10만 명 이상 사망했다. 기대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지원은 없었다. 고립무원의 핀란드는 당시 러시아와 대적할 유일한 세력이던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핀란드는 소련에 3억달러의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약소국의 현실을 인정한 핀란드는 이후 민주주의 원칙을 일부 포기하면서까지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동시에 조선업을 비롯한 수출지향적 산업을 일으켜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현대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소련과 대립해선 독립 자체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정직한 자기평가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일본의 경우 막부의 오랜 고립정책이 1853년 갑자기 들이닥친 미국 군함으로 인해 흔들렸다. 이때 일본은 막강한 서구의 무기와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 진단 아래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메이지유신은 군사, 정치, 외교, 교육, 문화 등 일본의 모든 것을 바꿔놨고, 이를 위해 일본은 치밀하게 유럽의 선진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일본의 태평양 전쟁 도발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과 달리 경험이 없는 젊은 군사 지도자들이 현실적이고 신중한 자기평가를 하지 못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선택적 변화의 좋은 사례로 꼽혔다. 독일은 전통적인 독일 사회의 많은 핵심가치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나치 시대의 과거를 철저하게 재평가했고, 이런 바탕 위에 서독이 경제기적을 이뤄냈다. 저자는 “독일은 나치의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이웃 국가인 폴란드, 프랑스와 원만하고 정직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며 “한국과 중국에 보여준 일본의 태도와 사뭇 달랐다”고 지적했다.
이 책의 미덕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진행형인 위기의 대표적 국가로 일본과 미국을 거론한다. 일본의 경우 경제력, 인적 자원 등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정부 부채, 인구고령화, 여성차별, 출산율 급감, 반이민 정책 등이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태도를 현재는 물론 미래의 위기 요인으로 저자는 꼽았다.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인정도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원폭 피해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 이런 태도는 향후 최대한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일본이 불안을 느낄 요인이라고 저자는 지적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정치적 양극화를 심각한 위기 요인으로 본다. 저자는 정직한 자기평가와 진단이 부족하다며 “울타리는 멕시코와 맞댄 국경에 쌓는 장벽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을 구분하는 울타리여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날린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