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전통은 미래 열어젖히는 힘의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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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서 인문학 강연“강도 돌아 굽이쳐 흘렀다는 의미를 지닌 하회마을은 수백 년 동안 양반과 상인, 노비 등 여러 대립되는 계급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남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남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감수성이 전혀 없죠. 하회마을은 우리 모두에게 ‘전통의 힘과 보수적인 것의 힘으로 우리 현실을 계속 개혁해 나갈 수 있을까’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훈(72·사진)이 5년 전 펴낸 에세이 《자전거 여행2》(문학동네)에서 소개한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6년여 만에 찾았다. 김 작가는 지난 1일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열린 ‘제1회 백두대간 인문캠프’에서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엔 이철우 경북지사, 권영세 안동시장과 지역 주민 등 700여 명이 참석했다.김 작가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석주 이상룡 등 안동 출신 유림 리더들이 지켜낸 전통 윤리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연 내내 유림 문화로 대변되는 보수적 전통에 미래지향적인 힘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안동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마을로 분류되지만 구한말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 리더들을 배출한 지역”이라며 “전통적인 힘으로 우리가 현실을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동의 개혁적 유림들이 스스로 증명해 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처럼 전통과 보수가 가진 힘이 미래를 열어젖힐 수 있는 바탕인데도 우리가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주된 동력으로 연결시키는 일을 등한시했다”고 지적했다. “근대화와 개혁은 전통을 때려부수고 전통을 박멸한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오랜 세월 실천하다보니 우리 사회는 전통이 가르쳐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나 연민,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잃고 천박한 잔재주의 세계로 들어온 거죠.”
김 작가는 “지금 우리 사회 특징은 한마디로 악다구니”라며 “상소리와 욕지거리, 거짓말로 날이 새고 있다”고 개탄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악을 쓰는 현 세태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퇴계나 서애 등 안동 선현들의 가르침을 꺼내들었다.
“퇴계 선생은 제자의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한 뒤 며칠 후에 답했죠. 서애 선생도 새가 알을 품듯 몇 달 동안 고요히 앉아 글 쓰고 생각하며 한곳을 오래 바라보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처럼 말을 바르게 천천히 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부터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김 작가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인격의 최고 목표로 ‘친절’을 꼽았다. 그는 “언젠가 죽게 되면 글을 잘 썼다느니 못 썼다느니 평은 관계없고 ‘그 사람은 참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