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유연성 빠진 '정년 연장' 추진…"기업 부담 키우는 반쪽짜리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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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불 지핀 '정년 연장' 논란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만 65세 정년 연장 계획을 두고 ‘반쪽짜리 정책’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정년 연장과 함께 논의해야 할 고용유연성 확대는 쏙 빼놓은 채 단순히 고령자를 노동시장에 붙들어매는 방안만 준비하고 있어서다.
호봉제 개편 등 '당근책' 없어
기업 인건비 부담 급증 불 보듯
정부는 자발적으로 고령자를 고용한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분위기를 띄운다는 계획이지만, 정작 정년 연장의 주체인 기업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처음에는 ‘권장’으로 시작되겠지만 곧 법으로 강제할 것”이라며 “경직된 고용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정년만 연장하면 기업 부담만 늘어난다”고 주장했다.고용유연성 뺀 채 정년 연장만 추진
3일 관계부처와 산업계에 따르면 기획재정부 산하 인구정책태스크포스(TF)는 고령자고용촉진법 19조에 ‘사업주는 60세가 지난 근로자에 대한 계속 고용에 힘써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업에 정년 연장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 의무’를 부과하는 식으로 압박하겠다는 얘기다. 정부는 1991년에도 같은 법 19조에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정할 때는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었고, 2013년 법으로 강제했다. 산업계가 정부의 ‘노력 의무’ 명문화를 ‘법제화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산업계는 생산가능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드는 만큼 정년 연장이 일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전날 KBS TV 프로그램에 나와 “향후 10년간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가 매년 80만 명에 달하는 반면 노동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10대는 연간 40만 명에 불과하다”며 향후 생산가능인구(15~64세) 감소에 우려를 나타냈다.산업계가 걱정하는 건 고용유연성 확대 및 호봉제 개편 논의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정년 연장이 논의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경직된 고용시장에서 정년만 연장하면 기업의 인건비 부담만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인구정책TF의 한 관계자는 “고용유연성 확대는 충분한 공론화가 필요한 사안이어서 이번에 대책을 제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년 60세 연장이 처음 도입되던 2013년의 혼란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당시 산업계는 “고용 유연화가 어렵다면 최소한 임금피크제와 정년 연장을 연계해 추진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2015년에야 임금피크제를 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을 손봤다.
정년 연장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논의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기대 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일정 나이를 기준으로 근로자를 퇴출시키는 정년 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미국 영국과 같이 정년 폐지를 논의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중소기업에만 인센티브 줄 듯
정부는 정년 60세가 전면 시행된 지 2년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당분간 도입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정년 연장을 장려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구정책TF 관계자는 “정년이 지난 근로자를 계속 고용하는 사업주에 대한 지원 방안을 설계 중”이라며 “인건비의 어느 정도를 정부가 지원할지, 상한선을 얼마로 둘지 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연내 관련 규정을 정비한 뒤 이르면 내년에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만 60세 이후에도 계속 일하는 대신 임금이 줄어드는 근로자에 대한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종료된 임금피크제 지원금 사업을 재설계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다. 이 사업은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기업과 근로자에 대해 삭감된 임금의 50%를 최대 2년간 지원하고 있다.정부 지원 대상에 대기업과 공기업은 제외될 것으로 알려졌다. 청년층이 가장 취업하고 싶어하는 공기업과 대기업에 정부가 정년 연장 장려금을 주면 ‘정부가 세대 간 일자리 전쟁에서 윗세대의 손을 들어줬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정년 연장에 혜택을 주는 건 확정적”이라며 “대기업과 공공부문은 더 많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상헌/서민준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