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길의 경제산책] "95%가 누진제 폐지 찬성"…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을 앞두고 정부가 국민에게 ‘3개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제시했다. 지난 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누진제 개편과 관련한 전문가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 사진=한경DB
정부는 최근 국민을 대상으로 ‘퀴즈’를 냈습니다. 유독 주택용에만 적용하는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해 1~3안을 공개한 뒤,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지요.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데, 하나만 제시했을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비판을 차단하려는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확실한 건, 전기를 많이 쓸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할증되는 주택용 누진제는 다음달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란 점입니다. 올 여름(7~8월)부터 누진제가 완화되거나 폐지돼 ‘냉방요금 폭탄’ 논란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참고로 가정용 전기 사용량은 전체의 13.9%(작년 기준)에 불과하지만 유일하게 누진제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팡팡 틀지 못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죠.정부가 공개한 대안은 (1)매년 7~8월 누진구간 확대 (2)매년 7~8월 누진단계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축소 (3)누진제 완전 폐지 등입니다. 정부는 한국전력공사 홈페이지의 온라인 게시판과 다음주(11일)로 예정된 공청회를 통해 국민 여론을 들을 계획입니다.

가장 중요한 여론수렴 창구는 한전 게시판입니다. 8일 오전 현재 450건 안팎의 의견이 올라왔는데, 압도적으로 ‘누진제 폐지(3안)’ 여론이 높습니다. 1,2안이나 ‘모두 반대’ 의견은 총 20여 건에 불과하지요. 약 95%가 누진제 완전 폐지를 지지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걸 정부가 그대로 밀어부칠 수 있을 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전기요금을 더 부담하는 가구가 생길 수밖에 없는 딜레마 때문이지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여당이 이 안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정부와 여당은 국민 저항이 가장 적은 1안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회사 리얼미터가 공개한 ‘설문’도 이상한 방향으로 귀결됐습니다. 이 회사가 지난 6일 발표한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에 대한 국민 선호’ 결과에 따르면, 여름철 누진구간 확대(1안) 선호가 40.5%로 가장 높았습니다. 다음으로 2안(누진단계 축소)이 23.2%, 3안(누진제 폐지)이 18.5%로 가장 낮았지요.

하지만 이 여론 조사가 공정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질문 자체가 특정 답안을 유도하는 듯했기 때문이죠. 아래 사진이 보여주듯 1안은 다수 가구에 할인 혜택을 주는 방안, 2안은 전기 다소비 가구에 할인 혜택을 주는 방안, 3안은 다수 가구의 요금을 인상하는 방안이 골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누진제 폐지’의 장점에 대한 설명이 없고 단점 위주로 나열됐습니다.
리얼미터가 공개한 전기요금 개편안 설문조사 결과./ 사진=리얼미터 홈페이지 캡처
그럼 민·관 TF가 제시했던 각 대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1안은 전력 사용량이 많은 2·3단계 가구에 각각 100㎾h, 50㎾h(월 사용량 기준)씩 상한을 높여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입니다. 작년 사용량 기준으로 총 1629만 가구가 매년 15.8%(7, 8월 각각)씩 요금 인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2안은 현행 3단계인 누진제를 매년 7, 8월에만 2단계로 줄이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전력을 많이 쓰는 3단계 구간(609만 가구)이 2단계 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1~2안은 모두 ‘손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상의 전기요금 인하 방안이죠. 그 부담은 모두 한국전력이 떠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지고 보면 한전 임직원도 굳이 정부와 각을 세워가며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한전이 적자를 내거나 부채가 늘어도 한전 임직원은 월급은 물론 성과급을 받는 데도 지장이 없으니까요. 공기업 경영평가는 손익이나 재무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기여’ 등에 더 많이 좌우되는 구조입니다.

결국 직접적인 피해는 주가 하락에 따른 한전 주주들, 최종적으로는 전 국민이 나눠서 입게 될 겁니다.누진제를 폐지하는 3안은 작년 폭염 때 국민 청원이 집중됐던 방안입니다. 2·3단계 구간의 요금을 크게 낮출 수 있는 데다 해마다 반복되는 주택용 누진제 논란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해외에는 누진제가 아예 없거나 최대 1.5배 수준이지요. 누진제를 폐지하면 ‘전력을 쓴 만큼만 더 내게’ 됩니다. 다만 전기를 상대적으로 적게 써 온 가정 1416만명의 요금은 소폭 오르게 됩니다. ‘필수사용량공제’ 등 혜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죠.

사실 ‘전력 저소비층=저소득층’이란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낮시간 맞벌이 때문에 집을 비우는 가정, 고효율 가전기기를 사용하는 가정 등은 전기를 적게 쓸 겁니다. 김종갑 한전 사장 역시 “나도 누진제 1단계 구간에 해당돼 매달 4000원씩 필수사용량공제를 받고 있다. 내가 저소득층인가.”라고 되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자녀가 많거나 부모를 모시고 있어 낮시간에도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는 가정, 저효율 가전제품이 많은 가정 등이 전력을 다소비하면서 해마다 ‘냉방요금 폭탄’을 맞고 있지요.

일단 누진제를 폐지한 뒤 진짜 ‘저소득층’을 위해 에너지 바우처를 확대하는 등 복지를 늘리는 게 최선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누진제 폐지의 3안이 채택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 듯 합니다. 할인 혜택을 받아온 1단계 가구 중 일부의 요금이 오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혜택보는 사람과 손해보는 사람이 모두 생기는 유일한 안입니다. 일부 요금 손해를 보는 사람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결국 전기요금이 인상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구요. 며칠 전 누진제 토론자로 나섰던 박호정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역시 “누진제 폐지를 골자로 한 3안의 채택 가능성은 낮다”고 했습니다.정부와 여당은 최적의 대안보다,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 ‘쉬운 길’(1안 또는 2안)을 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모두가 승자’인 해법은 없다는 겁니다. 공기업 부실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그때는 국민 전체의 짐으로 돌아올 겁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